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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그리고 정치와 문학/ 김연경(金燕景)

검지 정숙자 2017. 3. 15. 13:06

 

 

 『문학사상』2017-3월호/ 특집러시아 혁명 100주년의 재조명과 문학

 

 

     혁명 그리고 정치와 문학

 

      김연경(金燕景)/ 소설가, 번역가, 서울대 강사

 

 

 

  예언이 된 문학

  1917년 2월, 이어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러시아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예언한 바와는 전혀 달리,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기는커녕 차르가 통치하는 극도로 봉건적인 국가였다. 과연 혁명은 한 낭만주의 시인의 표현대로 '이성-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러시아의 독특성에 기반한 것일까. 실상 혁명의 전반적인 토대가 확립된 것은 대략 1861년 농노해방령 선포(알렉산드르 2세) 이후부터이다. 그 무렵 허무주의는 각종 불온한 자유사상 전반을 지칭하는 극히 정치적인 용어로 유통되었다. 도스또옙스키의 『악령』은 여기에 형이상학적인 의미까지 부여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공포는 물론 신을 죽인 허무주의의 심오한 공포까지 예언한다. 그럼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 체르니셰프스키를 비롯한 '60년대 세대들'의 활약은 1870, 80년대 인민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몇 번의 구사일생 끝에 결국 테러의 희생양이 된다. 도스또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예언한 친부살해가 정치적 차원에서 황제살해로 실현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이 일종의 '은유'였다면 20세기는, 미래파의 표현을 빌려, '은유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기어코 현실이 된 혁명에 대해 작가-지식인 대부분이, 적어도 우선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령 신사실주의의 대표자인 고리키는 영감에 차 '후다닥' 쓴 '중편소설'(작가 자신의 정의) 『어머니(1905) 에서 혁명의 이상을 찬미하고 그것의 실현, 성공 가능성을 자신한다. 소설의 배경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과 노동자 파업이다. 소설 속 어머니(펠라게야 닐로브나)는 남편의 폭력의 희생양이자 무학-무지의 전형으로써 봉건 러시아, 어머니-러시아를 상징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그녀의 아들 파벨이 의식화되어 혁명의 전선에 뛰어들면서, 그녀는 그저 한 아들의 어머니에서 모든 청년 혁명가들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정녕 혁명의 선언문이라고 할만한 이 소설은 고리키의 여러 수작과 함께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전범을 제공한다.

 

  낙관과 그늘

  고리키는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의 육화이자 혁명의 상징이다. 그의 초기작에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임한' 작가의 시선이 아니라 그야말로 '맡바닥'에서 포착된 노동자, 밀수꾼 등 막장 인생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들의 애환을 기록하는 작가 고리키의 붓은 무척 객관적이고 담담한 반면, 소설 바깥에서 조망하면 그가 전 시대의 두 작가(도스또옙스키, 톨스토이) 못지않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을 갖다 놓은 거의 건신주의建神主義의 기저에 깔린 것은 물론,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에 대한 전일적인 믿음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초기 단편 <이제르길 노파>(1895) 속에 삽입된 단코의 이야기이다.다분히 조직화된 신화적인 시공간, 어느 부족이 외적의 침입을 피해 도망치다가 진퇴양난에 처한다. 그때 지도자 단코가 나타나 그들을 이끌지만 힘들어진 민중은 거의 반란을 꾀할 만큼 거칠어진다. 이런 민중을 보며 단코는 분노를 느끼지만 이내 연민과 구원의 일념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그가 손으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낸 다음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그 불빛으로 민중을 인도하는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단코 덕분에 민중은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단코의 존재도, 그의 죽음도 인지하지 못한다. 여러 모로 작가의 이상이 표현된 것이다.

   한편,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는 고리키와는 달리 대부분이 귀족임에도 혁명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는 심지어 서사시 <열둘>(1918)에서 혁명을 거의 새 천년, 새 세계의 도래를 예고하는 사건처럼 묘사한다. '열둘'의 혁명가   볼셰비키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사제에 비유된다. 블록의 짝패 같은 또 다른 상징주의자   사상가 벨리는 고리키의 『어머니』와 똑같은 소재로 그 못지않게 굵직한 장편소설 한 편을 써낸다. 『페테르부르크』(1916)는 제목 그대로 대제국의 수도와 구체제 러시아의 상징인 원로원 의원 아블레우호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혁명가   테러리스트들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어머니의 불륜과 가출로 인해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그의 아들 니콜라이를 이용하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폭탄은 그들 집까지 전달되지만, 이미 노환과 치매에 시달리는 유력 인사를 겨냥한 테러는 통째로 희극이 되고 만다. 이와 더불어 혁명의 주체들이 겪는 노화, 내분, 발광 등도 주목된다. 한때 '불사조'로 불린 냉혹한 혁명가 두드킨은 고독과 환멸, 심지어 정신분열 상태에서 혁명의 수장인 립판첸코를 가위로 살해한다. 『페테르부르크』는 말하자면 혁명에 대한 고리키식의 장미빛 낙관주의에 대한 극히 미학적이고 어쩌면 지적인 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의 혁명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유리 지바고

  혁명과 맞물린 내전(1918-1920). 그 직후 '네프'(신경계 정책) 시기에 기법과 형식에 있어 다채롭고 현란한 작품이 많이 쏟아졌다. 혁명은 더 이상 찬반, 즉 이론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작가들의 붓도 거의 메스 수준이었다. 장식체 산문의 대가인 필냐크의 『벌거벗은 해』는 그 적나라한 제목에서 이미, 그리고 모자이크 같은 구성 방식을 통해 힘겨웠던 한 시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밖에 바벨『기병대』, 자먀틴 『우리들』, 불가코프 『백위군』, 올레샤 『질투』등 여러 작품을 통해 혁명과 내전의 실상, 문학과 정치의 역학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혁명은 곧 미학 혁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또한, 이들의 상당히 충격적 형식 미학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선언한 서유럽의 모더니즘 문학과 구분되는 극도의 정치성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혁명에 적극 가담한 미래파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는 그래서 거의 혁명의 아이콘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체제가 확립되고 수많은 작가들이 추방이나 숙청, 혹은 강제수용소에 있을 무렵,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일종의 조용한 광기 때문에 반쯤은 침묵을 강요당하며 내적 망명에 돌입한다. 원래부터 그는 '동반자 작가'라는 분류에 걸맞게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되 그것에 동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런 입장은 우선 그의 신분에서 기인한다. 그는 유대계 혈통의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예술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전형적인 귀족 지식인이다. 여기에 온건한 성격까지 가세했으니, 정치적으로 보자면 거의 우유부단한 회색분자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그가 오랜 침묵 끝에 거의 유일한 소설-장편인 『닥터 지바고』를 쓴다. 이는 작가의 고백록이자 그가 그토록 숭배한 마야코프스키(혁명 이후 자살한다), 즉 혁명의 희생양이 된 순수한 넋들 앞에 바치는 진혼곡이기도 하다.

  『닥터 지바고』는 역사적 격동기(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1917년 양차 혁명, 양차 세계 대전)를 배경으로, 보편의 역사와 맞물린 개인들의 삶을 작가 특유의 서정적 문체로 기록한 소설이다. 그 중 1917년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맞이하는 대목을 확대해보자.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군의관으로 징병되어 멜류제예보에서 3년 동안 복무한 뒤(여기서 남편 파벨 안치포프를 찾아 간호병으로 참전한 라라와 만난다) 모스크바로 귀향한 상태다. 시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호외판 신문을 통해 볼셰비키 측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반쯤 독백처럼 이렇게 말한다. "정말 대단한 외과수술이야! 악취 나는 해묵은 종양들을 단번에 예술족으로 싹 도려내다니! 사람들이 경배하고 추종하고 숭배하는 데 익숙해진 수세기 동안의 부정不正이 군말 없이 싹, 선고를 받았어."(1권 6부) 이렇게 두려움 없이 단번에 극단까지 간 것을 예부터 익히 알려진 민족성의 일면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혁명에 이토록 열광하지만 이후 그의 삶은 전락과 쇠락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지바고의 삶은 파스테르나크의 그것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는 혁명 때문에 말하자면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 필연성과 불가피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다, 너희가 잃을 것은 오로지 족쇄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고리키가 『공산당 선언』의 이 마지막 문구에 부합했던 만큼이나, 그것에 반대되는 작가가(일찌감치 망명한 골수 귀족 나보코프를 제외하면) 파스테르나크였다. 그 때문에 그의 손에 쥐어진 혁명의 주체(1905년 철도 파업을 주동한 노동자, 혁명 이후 내전 당시 파르티잔, 일반 민중 등)는 너무도 그악하고 거칠다. 극히 예외가 파펠 안치포프(스트렐니코프)인데, 그는 소설 속의 형상   성격이라기보다는 혁명의 순수와 불가피한 비극을 담은, 마야코프스키를 모델로 해 재창조된 하나의 상징에 가깝다. 이런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문학과 정치의 복잡다단한, 때로는 치사한 역학 관계를 뛰어넘었고 문학사의 냉혹한 심판을 거쳐 살아남았다.

 

  유토피아의 정치

  파스테르나크가 단초만 보여준 소련 사회의 실상은 솔제니친, 불가코프, 플라토노프 등 여러 작가들에 의해 소설적, 서사적 문법으로 형상화된다. 반체제 작가로 명성을 떨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암병동』,『수용소 군도』등은 사실적인 묘사와 가독성 높은 문체 덕분에 한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불가코프의 장편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현란한 문체와 기법, 풍자로 스탈린의 암흑을 교묘하게 포장한 걸작이다. 최근에는 진정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자였음에도 혹독한 탄압을 받은 플라토노프의 유토피아 소설이 각광받고 있다. 그의 『코틀로반』(구덩이) , 『체벤구르』가 보여주는 것은 비단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이상적 사상의 분원적 비극이다.

  일찍이 도스또옙스키가 『악령』에서 샤토프와 키릴로프를 통해 암시했듯, 몽상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카오스일 수밖에 없는 반면 그것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려면 불가피하게 정치체제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더 이상 몽상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이 정치다. 과연,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꿈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러시아문학이 고골리 이래 체호프와 더불어 공식화한 인간 본연의 저 속물성과 진부함이 우리를 짓누른다. 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마흔 살에도 사회주의자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2017년, 우리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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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경(金燕景)/ 197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6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이래 소설집『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미성년』『내 아내의 모든 것』『파우스트 박사의 오류』, 장편『그러니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고양이의 이중생활』등을 펴냈다. 도스또옙스키의 『죄와 벌』『악령』『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현재 소설가, 번역가, 서울대 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