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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일과 취흥 혹은 광기의 시인, 이백의 시편들/ 김경엽(金京燁)

검지 정숙자 2017. 3. 26. 16:33

 

 

   『문학사상』2017-3월호/ 연재중국문학 산책 14회

 

 

    은일과 취흥 혹은 광기의 시인, 이백의 시편들

 

    김경엽(金京燁)

    

 

  1. <정야사>와 기억 놀이

  돌이켜보니, 학부 4학년 때의 일이다. 『중국문학사』기말시험 보던 날이었다. 모든 시험이 그렇듯 그날도 적당히 긴강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시에 들어온 담당교수는 답안지를 나누어 준 다음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칠판에다 또박또박 문제를 쓰기 시작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분필 글씨를 조마조마하게 따라 읽어가던 우리들은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경악에 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출제된 문제는 딱 두 문항이었다.

 

  1. 한 학기 동안 『중국문학사』를 배우고 느낀 점을 쓰시오.

  2. 중국 시 중에서 한 편을 외워 쓰고 자유롭게 비평하시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허를 찔린 우리들의 교실은 한동안 한숨과 원망 섞인 투정으로 어수선했다. 사전에 시험과 관련된 어떤 정보나 암시도 없었던 터라 나 또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다시 한 번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번 문제는 그렇다 치고, 정작 걱정되는 문제는 2번니었다. 비평은 고사하고 한 번도 외운 적 없던 중국시를 어떻게 쓴단 말인가. 하얀 답안지가 이렇게 캄캄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생각나는 한 구절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몹시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시 비슷한 구절이 희미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하기 시작했다. 썼다가 지우기를 몇 번씩 반복하며 가까스로 시 한 편을 외워 썼을 때는 시험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답안지에 써넣고 나온 시는 이러했다.

 

  床前看月光 침상 앞의 환한 달빛

  疑是地上霜 잠결에 서리가 내렸나 했네

  擧頭望明月 고개를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니

  低頭思故鄕 고향 생각에 머리가 숙여지는구나

 

  이백李白의 <정야사靜夜思>란 작품이다. '고요한 밤의 고향 생각'이란 뜻이다. 평소 이 시에 대해 특별히 감동을 하거나 외운 적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이 시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다만, 교과서에서 두어 번 인상 깊게 읽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하는 중에 이 시의 단어와 구절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하나 둘씩 떠올랐던 건, 신기한 일이다. 시에 대한 감식안이랄 것도 없이 시를 보는 눈이 '하얀 백지' 같던 시절, 그때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비밀이 이제는 조금 풀릴 듯하다. 외운 적도 없던 시가 기억에 떠올랐던 건, 시 전체 내용을 자연스런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 떠올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시의 첫 구와 둘째 구의 이미지를 나는 온몸으로 체험한 적이 있다. 열 살 전후 무렵 고향에서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무심결에 마당을 내다본 순간, 숨이 콱 막혔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렇게 큰 달은 그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슈퍼 문이라고 하나. 가깝고 거대한 달이 막 지상을 덮칠 듯했다. 어린 마음에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온 누리에 내린 그 환한 달빛이라니. 순간, 어린 나는 눈 내린 것으로 '완벽하게' 착각했다. ' 눈 내린 겨울에 나는 왜 아직 반팔을 입고 있지?' 라는 엉뚱한 혼란과 착란의 시간이 한 1.5초 가량 지속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아주 올ㄹ래 된 그 달밤의 공포와 착란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소중하고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마 이백이 구사한 1, 2구의 이미지 역시 이와 비숫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까, 나는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환하게 뜬 달을 보고 잠결에 마당을 내다보는 순간, 서리가 내린 것으로 착각한 그의 심정과 그에 따른 시적 발화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 4구의 절묘한 대구와 이미지의 순차성 또한 이 시를 기억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고개 들어 밝은 달을 보았다면, 고개 숙여 고향 생각에 젖는 것이 이미지의 전개상 자연스럽다. 두어 번 밖에 본 적 없던 시였지만, 아마도 흐르듯 전개죄는 이미지의 순해에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나의 무의식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밝은 달, 마당, 서리, 고향 생각 그리고 고개를 들고 숙이는 구체적 행위들이 맞물리면서 거기에 맞는 낱말들을 희미한 기억 속에서 끌어올렸고, 이것들을 배열하여 한 편의 시조 조합해냈던 셈이다. 오래 전 사소한 경험을 길게 이야기한 취지는 사실 <정야사>에서 드러나는 이백 시의 중요한 미덕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은 이제 어지간히 상투적인 수사이지만, 이백의 시를 위해 꼭 한 번만 더 써볼 참이다. 이 사내의 시는 도저히 꿰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견강牽强이 없는 것이다. 견강이란 억지로 끌어다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억지를 부릴 떄, 시는 난삽과 헛된 제스처 사이를 방황한다. 불편하고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억지 부리지 않은 시는, 애써 외우지 않아도 깔아놓은 이미지의 통로를 따라가며 연상하면 어느덧 우리의 무의식에서 조금씩, 희미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정야사>는 이미지의 돌발성이나 창의성 측면에서는 좀 범작에 속하긴 하다. 하지만 한 글자도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이미지의 완결성과  간결성은 이백 시의 또 다른 매혹이다. 그이 시 만큼이나 매혹적인 삶을 살았던 이백의 생애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의 생애는 그의  시의 이미지처럼 결코 간결하거나 매끄럽지 않았다.

 

 

  2. '낭만선객' 이백

  동양문화권에서 이백(李白, 701~762)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보(杜甫, 712~770)와 더불어 '이두李杜'로 통칭되는 두 사람은 중국문학의 양대 슈퍼스타이다. 시의 나라인 중국에서는 무수한 시인들이 명멸했지만, 시인으로서 두 사람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두보가 리얼리즘의 맨 앞자리에 있다면 '시선詩仙'의 칭호를 얻은 이백은 로맨티시즘의 거봉이다. 당대의 재상이자 시인인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붙여준 '적선인謫仙人'이란 별칭처럼 이백은 도저한 로맨티스트였다.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어서였을까. 그의 혈통과 출신 또한 좀 미스터리한 면이 있다.

  그의 선조는 오래 전에 죄를 지어 서역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705년 경에 이백의 부친 이객李客이 가족들을 데리고 지금의 사천으로 몰래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이백의 나이 5살 무렵의 일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백이 한족의 아버지와 이민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이라는 설이 제법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출생지는 당시 북서쪽 변방인 쇄엽碎葉, 그러니까 지금의 키르키즈 공화국 경내였다고 한다.

  대상인으로 성공한 부친 덕분에 이백은 어려서 제법ㅂ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유년시절부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었다는 호사가들의 호들갑은 물론 과장된 전언이겠지만, 소년 이백이 백가百家의 학문과 문장을 섭렵하고 일찍부터 시문창작에 재능을 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협객과 어울리며 검술을 수련하고 임협任俠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파의 기질이 다분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방안에서 글만 읽는 유생들은 행동하는 협객만 못하다(儒生不及遊俠人유생불급유협인, 白首下帷復何益백수하유복하익)"고 일갈한 그의 기개는 그가 책상머리 앞의 유약한 문사나 유학자들과는 매우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백은 20대 중반부터 집을 떠나 유랑과 방랑을 시작한다. 길 위에서 그는 자유롭고 분방했다. 유서 깊은 명승과 고적을 탐방하고 각 지역의 다양한 물산과 풍물, 대가들의 각종 예술과 예인들의 가무를 편력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중앙정치무대에 천거해 줄 후원자를 찾기 위해 지역의 유지와 권세가의 문지방을 닳도록 넘어 다녔다. 이 시기에 그가 설정한 인생의 목표는 도가적 은둔지향과 세상에 나가고자하는 출세 지향이 공존하는 상태였다. 두 가지 목표는 언제나 충돌했고, 양 극단의 모순 사이에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방황은 길고도 뜨거웠다.

  마침내 이백은 지인인 오균嗚筠의 추천으로 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현종玄宗을 대면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라는 관직을 제수 받는다. 그의 생애 최초의 관직으로 42살 때의 일이었다. 가슴 속에는 절묘한 시구를 품고, 머릿속에는 치국의 전략을 담은 채 장안으로 향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실현할 꿈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그가 좌절에 빠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애인인 양귀비楊貴妃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에만 이백을 불렀다. 이백은 화청지華淸池에서 목욕하는 양귀비 옆에서 그녀가 깔깔깔 웃을 수 있도록 시나 지어 읊어주는 내시나 '기쁨조'의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는 장안 바닥에서 날마다 취했다. 이윽고 사표를 내던지고 장안을 빠져나온 것은 그의 나이 44살 때, 장안에 입성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장안에서 나온 후 시작된 두 번째 방랑의 시간은 755년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무렵 이백이 11살 아래의 두보를 만난 건, 훗날 문학사상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당시의 두 사람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교유는 6개월에 불과했지만, "술에 취한 가을 밤 같은 이불을 덮고 잘醉眠秋共被"정도로 대문호 사이의 관계는 돈독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어느 날 두보가 이백을 생각하며 쓴 시 한 편은 이백의 진면목을 제대로 포착한 절창이다. 「불견不見」이란 시의 일부이다.

 

  이미 이백을 못 본 지 오래 不見李生久

  미친 척 사는 모습 참으로 애처롭다 佯光眞可哀

  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헤치려 하지만 世人皆欲殺

  나 홀로 그의 재주 아끼고 싶다 吾意獨憐才

  민첩한 재능으로 시 천 수를 짓고 敏捷詩千首

  한 잔 술에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사람 飄零酒一杯

 

  이백의 말년은 시시각각 위태로웠다. 755년 이백의 나이 55살 때에 발생한 '안사의 난'은 전성기의 당 제국이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백 또한 동란의 와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종의 5남인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참모 역할을 잠시 했는데, 나중에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줄을 잘못 선 것이다. 이린은 이미 형세가 기운 썩은 동아줄이었다. 이백은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끌려갔고 어쩌면 형장으로 끌려갈 신세였다. 그러나 운 좋게도 사면되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사면된 이백은 761년 안휘의 당도로 갔다. 그곳의 현령으로 있는 친척 이양빙 李陽氷에게 의탁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이백은 중병으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2세였다.

  『구당서舊唐書』는 이백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왕이 모반을 일으켜 군대가 패했는데, 이백이 연루되어 야랑으로 긴 유배 길을 떠났다. 후에 사면되어 돌아왔으나, 술을 지나치게 마셔 취한 채로 선성宣城에서 죽었다."

 

  취한 채로 죽었다는 기록은 과연 '통음광객痛飮狂客'다운 이백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채석강采石江에서 술에 취한 채 물놀이를 하다가 강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낭만선객浪漫仙客' 이백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전설이다.

  이백의 개성은 몇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분방한 낭만과 고요한 은둔으로 향하다가도 어느새 격렬한 현실로 돌아와 출세와 공명의 성취에 안달이 났다. 고매한 예술적 감수성과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불사르다가 또 어는 순간, 차가운 입선入仙과 구도의 적막 속으로 침잠했다. 그는 평생을 출세와 은둔, 선계와 속계 사이에서 방황한 광객光客이었다. 이백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완벽하게 무능했다. 재물을 우습게 여겼고, 평생을 놀고먹었다.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렸고, 아내는 산후조리 잘못으로 죽었다.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했던 이백 정신은 위대한 문학을 낳는 데만 집중되었다. 이백 시가 보여주는 해방과 은둔의 경지는 동양적 유토피아를 방불케 한다. 적요하고 쓸쓸했다. 

 

 

  3. 탈속과 은일

  우리가 널리 애송하는 한국 시 한 편을 먼저 보자. 김상용(1902~1951)의 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소탈한 인정미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의 태도가 도드라진 작품이다. 간결한 형식 속에 자족과 무위, 은일을 욕망하는 시적 진실을 충분히 담아냈다. 삶이 우리에게 '왜'냐고 물을 때, 시인의 대답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침묵과 웃음은 삶의 모호성과 애매성을 가장 정확히 해석한 시의 언어 같다. 사는 뜻을 궁금하게 여기는 우문에 대한 현답인 "소이부답"을 천삼백 년 전 이백이 선취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다.

 

  청산에 깃들어 사는 뜻을 나에게 물어봐도 問余何事棲碧山

  대답 없이 웃을 뿐, 마음만 절로 한가롭소 笑而不答心自閑

  물결 따라 복사꽃 아득히 흘러가니 桃花流水杳然去

  여기는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라오 別有天地非人間

 

  탈속 지향의 은사로서 이백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거친 갈옷을 입은 채 가장 자유로운 자세로 산중에 묻혀있는 이백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시인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지만, 사실은 마음의 상태인 '한'에 그 대답이 들어있을 것 같다. '한'은 강박이나 강요, 인위와 작위를 모두 잊거나 법리고 난 후 찾아오는 널찍한 여유와 한가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물결에 실려 흘러가는 복사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득한 마음을 닮았다.

  '도화桃花'는 도연명(陶淵明, 365~427) 이래 중국이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메타포이다. 이백은 어느새 자신이 깃든 청산을 이상향으로 설정한 셈이다. 따라서 이 시는 동양의 오래된 은일적 공간 또는 유실된 이상향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백의 소망을 함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소망의 발원지는 공명과 출세를 위해 부딪치고 깨지고 수모를 당했던 저잣거리와 세속권력의 세계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좌절된 출세의 욕망을 다스리고, 은일과 함께 취흥醉興의 세계에 대한 탐닉이었다. 이백의 뛰어난 시편 중 많은 부분이 음주에 관한 시이다.

 

  

  4. 취흥과 광기

  이백이 장안에 머물렀던 약 3년 동안 800일 이상을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잠들었다는 전언은 좀 과장된 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귀비와 환락에 빠진 현종의 타락한 정권 밑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기회가 좌절되자, 날마다 폭음으로 시름을 달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점점 방탕해졌고, 술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 무렵 이백의 모습을 우리는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통해 생생하게 보게 된다.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을 쓰고 李白一斗詩百篇

  취하면 장안 시장 술집에서 잠들었지 長安市上酒家眠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天子呼來不上船

  스스로 술 취한 신선이라 부르네 自稱臣是酒中仙

 

  저 백 편 중에 한 편이 바로 그 유명한 「월하독작月下獨酌」시리즈이다. 그 중 일부이다.

 

  꽃나무 사이 술 단지 놓고 花間一壺酒

  친한 이 없이 홀로 술 따른다 獨酌無相親

  술잔 들어 달과 건배하니 擧杯邀明月

  달과 나와 그림자까지 셋이어라 對影成三人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月旣不解飮

  그림자만 덧없이 나를 따라 마신다 影徒隨我身

 

  '월하독작'이라 했으니,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다. '혼술'의 아득한 원조격이다. 이때 이백은 궁정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그를 배척하는 환관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처지였다. 시름에 겨운 나날들이었으나, 술은 달과 나의 그림자와 함께 마실 수밖에 없었다. 3자의 음주 풍경이 동화처럼 천진하되, 달빛 아래 드러난 '주선酒仙' 이백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보일 듯하다. 술 취한 이백은 과연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래의 시는 호기심을 품은 독자들을 돌연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데려다 주고 있다. 「자견自遣」이라는 시다. '스스로 달래거나 위로한다'는 뜻이다.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술 마셨지 對酒不覺暝

  취해서 누운 사이 옷 위에 수북이 쌓인 꽃잎 落花盈我衣

  취한 채 일어나 냇물 속 달과 함께 걸어가는데 醉起步溪月

  새는 돌아가고 인적마저 끊긴 길 鳥還人亦稀

 

  혼자 술 마시는 저녁,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졌다. 술에 취한 이백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쓰러져 잠이 들었을 게다. 잠든 사이 이백의 몸 위로 져 내려 이불처럼 덮는 꽃잎의 풍경이라니. 쓸쓸하게, 사무치게, 아름답다. 아름다운 풍경은 다음 구절에도 이어진다. 자다가 일어났으나 취기는 여전하다. 어디론가 돌아갈 시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냇물에 비친 달이 따라온다. 새는 숲속으로 돌아가고 인적마저 끊긴 길을 가는 것은 취한 이백뿐이다. 텅 빈 우주 속을 비틀비틀 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마지막 구절은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강설江雪」중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온 길엔 사람 자취 끊겼다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라는 명구를 낳은 젖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백의 시 또한 시각적 이미지가 압도적이다. 이렇게 설명 아닌 묘사로 일관할 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일에 육박한다. 취한 듯 그린 시 속에서 이백의 아름다운 적막과 쓸쓸한 고절의 미학이 취흥처럼 빛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장진주將進酒」는 '주선' 이백의 장쾌한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작 중의 하나다.

 

  그대는 보았는가 君不見

  황하의 물 하늘에서 내려와 黃河之水天上來

  거세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을 奔流到海不復回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

  높은 벼슬아치도 거울 속의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高堂明鏡悲白髮

  아침에는 푸른 실 같더니 저녁엔 어느덧 하얗게 세었네 朝如靑絲暮成雪

 

  ……

 

  하늘이 나에게 주신 재능 반드시 쓸모 있을 것이고 天生我材必有用

  천금을 탕진한다 해도 반드시 또 생길 것이니 千金散盡還復來

  소 잡고 양 잡아 모름지기 즐길 뿐 烹羊宰牛且爲樂

  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會須一飮三百杯

 

  ……

 

  바다로 간 강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듯 한번 간 세월은 돌이킬 수 없고, 어떤 부귀영화도 흐르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 노쇠해가는 애상을 이렇게 호쾌한 스케일로 그릴 수 있는 건, 이백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불가역의 시간성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늘이 내린 천부의 재능으로 경세와 치국의 포부를 한 번 실현해 보는 것이리라. 이백은 늘 주머니가 텅 비어있었지만, 재물 따윈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한번 마시면 크게 취했고, 크게 취하면 칼을 뽑아 들고 덩실동실 춤을 추거나 마당에 누워 하늘과 땅을 이불과 깔개로 삼았다.

 

 

  4. 가장 '이백스러운'

  스스로를  "초나라의 미치광이我本楚狂人"라고 했던 이백의 광활하면서도 낙천적인 기질은 남다른 시간과 공간 감각을 길러 주었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첫 문장은 우리에게 이백의 야성과 광기 그리고 낙천적이고 광활한 스케일을 모두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천지는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여관이고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시간은 영원히 지나가는 객이라 光音者百代之過客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즐거운 날 며칠이나 되리오

  옛사람 촛불 켜고 밤새 놀았다하니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그만한 까닭이 있었으리라 

 

  천지라는 공간에서 쉼 없이 변해가는 만물의 유전성과 무한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인식은 야성과 자유를 붓으로 삼아 유랑한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통찰이다. 한 생애를 남김없이 탄진해 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니 천고의 명문, 저 아름다운 글은 가장 '이백스러운' 문장이다. ▩

 

    (※ 챕터 넘버의 중복, 원문과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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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2017-3월호 <연재중국문학 산책 14회>에서

   * 김경엽(金京燁)/ 시인, 강원 원주 출생, 2007년『서정시학』으로 등단, 고려대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현재 총신대 교양학과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