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계간 파란』 2016 겨울호 - 분노(발췌)

검지 정숙자 2017. 2. 14. 02:49

 

 

   『계간 파란』 2016 겨울             분노

 

 

     issue  분노(발췌)

 

 

 

  채상우 _ 학살

 

  분노하라

 

  사랑이 시작되려 한다. (권두언, p-7)

 

 

  손병석 _ 그리스 철학에서의 분노의 개념과 역사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고 정의한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역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들 철학자들은 여타의 피조물과 다른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이성적인 사고 능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p-15)/ 한 사회가 보다 나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그 구성원들의 분노에 눈을 감거나, 눈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한 분노에 눈을 감는 사회는 곧 그 사회의 불의와 부정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용인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p-15)

 

  박찬부 _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과 분노의 문제 ; K씨의 분석 사례를 중심으로 

  동급생이나 상급생에게 위협이나 폭행을 당하는 학생, 또는 집단 따돌림이나 이지매 현상에 노출된 학생들은 하나같이 외견상 유약하고 자기표현이 약한 부류의 학생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의 세계는 다르다. 외부적 공격에 노출된 그 외견상 소심한 학생들의 내면에서는 그 공격자들을 격퇴(counter-attack)하기 위한 에너지 집중(catoexis) 동원령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p-51)

 

  박혁 _ 분노와 권력의 이중주 ; 한나 아렌트와 분노의 권력화

  어두운 시대를 희미한 불빛으로 견디고 지켜왔던 사람들에 관한 평론적 글을,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인간은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그러한 밝음은 이론이나 말보다는 몇몇의 사람들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일 안에서 켜 둔 불안하게 가물거리는 희미한 빛"에서 온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켜는 불, 그 불의 심지는 분노다. 분노는 불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가장 어두운 시대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불의만 존재하고 분노가 존재하지 않을 때"다. (p-65)

 

  이성혁 _ 촛불 봉기를 마주하며 '분노의 시'들을 읽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이를 변형하여 말하자면, 타인과의 공통적인 것의 구축에 따라 일어나는 기쁨을 사랑의 정동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노는 사랑의 정동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절망과 증오에 빠질 수 있다. 분노가 기쁨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분노를 공통적인 정동의 구축력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힘이 필요하다. 분노가 타인과의 연대성을 회복하면서 새로운 삶을 이끌어 내는 사랑으로 이행할 때, 분노는 저항과 혁명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분노를 저항과 혁명의 방향으로 이행시키는 분노의 시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 (p-125)

 

  고봉준 _ 분노의 시대, 분노하지 않는 시

  오늘날의 문학은 '분노'라는 익숙하고 투박한 길보다 유쾌한 반란과 분열의 길을 선호한다. 이 반란과 분열을 경유하지 않은 '분노'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이 반란과 분열의 언어가 과거에 비해 뚜렷한 주체상에 대한 의지가 약한, '나'라는 존재의 향방마저 불투명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실감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전제되지 않으면 '분노'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 우리 시대의 시는 명확한 주체상에 대한 지향보다 끊임없이 자신의 분열상을 재사유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에 '분노'와는 상반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138)

 

  이현승 _ 지금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슬픔이 산 하나를 매달고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라면 분노는 바로 그 산 하나를 날려 버리는 폭발과 같은 느낌이다. 바로 여기에 분노의 역동성이 있다. 그런데 종종 놀라운 것은 다중의 이 단순하고 거센 분노의 표출이 많은 순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음 단계로 굴려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에서 보듯 우리는 일견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상수와 변수의 곡선 속으로 포함시킬 만큼 민첩한 계산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더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시달리면서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시대에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 자체인 것이다. (p-149)

 

  고명철 _ 타락한 정치권력에 침묵할 수 없는 대학의 양심

  아직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의 성숙한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데도 우리의 대학은 너무 안이하게 민주주의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는 데만 열중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달리다 보니, 자신보다 조금 뒤처진 약자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존하고 상생하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는 것은 너무 쉽게 대학이 투항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대학이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과 혼돈이 결코 이번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대학 사회의 구성원들은 엄중히 성찰해야 한다. (p.156~157)

 

  김해자 _ 분노하라 희망하라 바꾸라

  스피노자에 의하면,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마음이자,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한 감정이다. 웃음은 정말 좋아서 웃는지 불확실하다. 울고 있는 사람조차 때로 속마음이 다를 수 있고, 척할 수 있다. 하지만 눈을 부릅뜬 성낼 '진(嗔)'은 속일 수가 없다. 이게 사람한테 차마 할 일이 아니지 싶을 때 치미는 분노.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버젓이 저지를 때 '이건 사람 도리가 아니지' 떨쳐 일어서게 되는 힘, 이것이 공분이자 희망으로 가는 고속도로다. 희망은 결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의심이 되지만,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그리움 아니겠는가 (p-163)

 

  박시하 _ 우리의 몸짓과 말로써 분노합니다

  우리는 애당초 분노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요. 그것에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요, 우리는 누구에게 화를 내어야 할까요. 그 대상은 동시에 여러 곳으로 향하지만 첫 번째 종착지는 '나' 자신일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살아가는 자신을 향한 분노. 저항해야 할 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분노. 분노해야 하는데도 분노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분노. 또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 이 수많은 분노가 제대로 내 안에서, 나를 거쳐서 바깥으로 그리고 결국 올바른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또한 거쳐가야 할 곳은 나와 우리의 '망각'에 대한 경계와 분노입니다. 망각은 힘이 셉니다. 망각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위협하고 잠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둠 속에 빠뜨립니다. (p.170~171)

 

  이범근 _ 슬픔과 분노를 갱신하며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의 스승의 날이 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풍선과 촛불 켠 케이크, 교탁에 놓인 꽃다발과 선물들, 스승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교실에서 제가 떠올린 것은 그때까지도 팽목항 찬 물속에 잠긴 진짜 스승들이었습니다. 스승인 척, 어깨에 힘준 어른들이 어른거리는 세상, 자칭 스승과 자칭 지도자와 자칭 원로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 그 한편에 제 어깨도 들이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기 초부터 아침마다 학생들에게 '우리는 한 배를 탄 사람들이잖아'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칠 때, 나는 정말 교탁 위에 내 목숨을 꺼내어 놓고 말했었는지. 또 우리가 탄 한 척의 배가 쓰러져 갈 때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너희를 살리고 있을까. 수없이 되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꼭 기억하자고, 기억해서 끝까지 슬퍼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인격과, 세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을 위한 말이면서 동시에 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p.180~181)

 

  장석원 _ 징벌 ; J에게

  시를 쓰는 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묻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가. 당신이 쓰는 시는 무엇인가. 시가 무기인가. 시가 자본인가. 시가 개인적 감정을 쏟아 놓는 재활용 쓰레기통인가. 시는 왜 쓰는가. 어떻게 시가 타인에게 칼이 되는가. 시를 쓰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속여도 되는가. 시는 잘못된 행동의 면죄부인가. 잘못된 행동이란 무엇인가. 시의, 예술의 낭만을 위해서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더 좋은 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일탈이 필요하다고 강변할 수 있는가./ 물리적으로  실행되지 못한 말이다. 행동의 수반 없는 말에 불과하다. 나는, 어쩌면, 동조자일지도 모른다. 일단 피해야 한다. 삼가자. 그 누구도 만나지 말자. 화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침묵하자. 그것들, 그럴 줄 알았어, 씨발 것들, 인간 말종들…… 시 쓴답시고…… 때로는 변두리 술집 그늘 속에 숨어 킬킬거리기도 했다. 그들의 시가 푸석, 부식되는 광경을 고소해했다. 이번 기회에 다 터져라. 빌기도 했다. 왜 안 나오지. 조바심 내기도 했다. 입에 담기도 쪽팔린 검색어들. 문단 내 성폭력, 공황장애, 대필, 고문, 처제…….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 나는 취했고, 나는 말했다. 교수니까, 권력이니까, 너무나 큰일이 벌어지게 되었으니까, 모두가 관여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니까, 모두가 쉬쉬하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어이 친구, 내 말이 맞지? 맞지!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정확하다. 그런데 말야, 그런데, 그런데,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니? (p.184~185) 

 

  김윤이 _ 술자리 문화

  최근 문단 내에서 벌어진 성추행 · 성폭력 사태들도 모두 잘못된 술자리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술 마시는 법도까지도 어른에게 배우던 우리의 정신은 모두 없애고, 오히려 근대에 잘못 파생된 접대와 기생 문화를 여태껏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 왔다. 어느 직장이나 직장 내 인권이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으며, 직장 내 업무 시간에 더해 회식과 술자리로 이동하는 업무 외인 시간에서마저도 명령과 위계질서, 갑질의 횡포가 이어졌다. 경제적 개념(돈)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예술인들의 술자리에서조차 문제가 불거졌으니 우리나라의 잘못된 문화가 얼마나 확산되어 왔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전업 작가로 나서고서도 필자는 똑같은 술자리 접대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등단 초 문인들과 술자리를 한 후로는 술자리를 가지지 않을 것인가, 글을 쓰지 않을 것인가로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술자리를 가지지 않기로. 그리고 원고 청탁이 끊긴다 해도 나의 작가적 역량을 탓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이유인즉, 이젠 이 땅 누구나 아는 한국의 잘못된 술 문화 때문이다. (p-196)/ 역설적이게도 옛 정신이 필요한 미래다. 예의를 지키며 즐기는 문화가 시급하다. (p-197)

 

  구모룡 _ 구체적인 것과 다른 곳을 사유할 자유

  제임스 조이스와 헤르만 헤세에게 고향이란 무엇일까? 조이스는 고향을 떠나서 고향 이야기를 소설로 썼지만 끝내 귀향하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는 1919년『데미안』을 쓰고 난 뒤부터 초속적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새로운 고향 몬타뇰라에서 자연과 사랑과 평화를 묵상하는 내용의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헤밍웨이는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 태생이다. 이곳에서 초년을 보냈는데 그의 생가와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산 플로리다 키웨스트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가옥 박물관이 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프랑스, 아프리카, 쿠바 등 세계를 여행하며 살았다. 파리는 물론 스페인의 론다 등 세계 도처에 그를 기념하는 장소가 존재한다. 특히 쿠바의 아바나에 그의 기념관이 있으며 그가 낚시를 즐겨했고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코히마르 마을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마을에 가면 헤밍웨이의 족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과연 헤밍웨이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였을까. (p.197~198)

 

  권창규 _ 2016년 11월의 역사, 비정규 교수 노동과 인문학

  임용은 정규직 교수로 채용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일상 화법에서 '임용되었다', '취직이 되었다'는 말은 정규직 교수가 되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간강사라는 이름의 비정규 교수는 일상 화법에서 교수로 칭해지지 않는다. 그냥 '강사'다. 시간강사들은 교수가 되지 '못한' 미완태 혹은 잉여태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강사가 정규 교수가 되면 문제는 해결될까? 앞선 세대 연구자들의 비교적 순탄했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괜찮았던 교수로 임용되면 강사로서의 지난 설움은 모두 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대개 그랬고 그렇게 선배들의 앞길이 '풀려 왔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요 근래 특히 경영대학, 공과대학을 제외한 인문사회대학, 예술대학, 이과대학을 중심으로 앞길이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대학 구조 조정 현실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학 구조 조정이란 강내희(『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의 말을 빌리자면 기업이 새로운 경영 논리로 기업이 도입, 작동되고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 정책 속에서 대학은 뒤늦게 구조 조정의 직격탄을 맞은 셈인데, 2014년부터 박차를 가하고 있는 대학 구조 조정의 명목은 학령인구 감소 때문이고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정원 감축'이 대학 구조 조정의 틀로 제시되어 있다. (p.215~216~217) 

 

  전호석 _ 취직에 대한 뻔하고 원론적인

  초등학생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장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취직을 위해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주변 선후배와 동기 친구들은 여러 활동을 했다. 무언가 멋진 물건이나 기획을 발표하는 공모전, 외국에 가서 언어를 배우는 어학연수, 직무를 미리 체험해 본다는 인턴, 해외 자원봉사, UCC 제작…… 활동, 활동들. 취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개인적 흥미 못지않게 사람들을 움직였다./ 정부는 대학의 품질 기준을 취업률로  잡았다. 취업률이 낮은 대학은 부실 대학으로 낙인찍힌다. 예외 없이 모든 학과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시켜서 예술대학이 부실 대학으로 지정되고, 문예창작과가 다른 과와 통폐합된 사례도 있다./ 몇 년 동안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된다면, 면접관은 몇 년에 걸친 그 사람의 고민과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취업과 관련된 어떤 활동을 했냐고 캐물을 것이다./ 취미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 중 다수를 차지하는 말이 있다. '그것을 해서 어디다 쓸 것이냐?'/ 위 단문들에는 시스템과 개인이 혼재되어 있다. 시스템은 취직과 관련이 없는 활동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적하고 단죄한다. 개인은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취업 바깥의 일들은 일탈이 된다. (p.229~230)

 

  박진호 _ 뭣이 중헌디?

  프랑스 철학자 미셀 세르는 요즘 아이들을 신인류라 지칭했다. 신인류는 가상 세계에서 산다. 웹에서 서핑할 때, 엄지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위키피디아나 페이스북을 훑어볼 때 자극받는 뉴런과 뇌의 부위는 책, 칠판 또는 공책 같은 것을 사용할 때 자극받는 뉴런과 뇌의 부위와 다르다는 사실이 인지과학 분야에서 밝혀졌다. 신인류는 여러 정보들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인식한다. 신인류가 정보를 취합하고 종합하는 방식도 기성세대가 사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신인류의 머리는 기성세대의 머리와는 다르다. 휴대폰을 통해 누구와도 연락할 수 있으며, GPS를 통해서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들은 지식의 대부분을 인터넷에서 획득한다. 기성세대들이 물리적 거리에 의존하고 미터법을 통해서 공간을 인식하고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갈 때, 신인류는 새로운 이웃 개념으로 무장한 채 가상 세계라는 추상적 공간을 넘나든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지 않는다. 이런 신인류의 아이들에게는 과연 어떠한 교육정책이 필요할까? (p.236~237.)/ 노자의 『도덕경』에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생선을 조리하듯 한다는 뜻이다. 작은 생선을 조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해야 할 일은 알맞은 열을 가하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생선을 집적거리는 것일 게다. 조리면서 내버려 두라. 알맞은 열을 제공하면 그뿐이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억누르지 마라. 아이들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일이지 수시로 정책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되어 교육의 본질을 자꾸 혼탁하게 할 뿐이다. (p.238~239)

 

  이승은 _ 누가 가만히 있는 자를 두려워하랴

  나 역시 고용이 불안정한 대학 시간강사다. 당장 다음 학기에 어찌 될지 모르는 운명을 살고 있다. 비정규직이니 고용 불안정이 일상이 되었다지만 정규직인 남편도 회사에서 언제 명퇴를 종용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딱히 나의 상황이 지금 막 육아를 시작한 다른 엄마들과 다른 특별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현재 어린아이를 키우는 대개의 부모의 상황은 나와 엇비슷할 것이다. (P-245)사실상 우리가 화라는 말을 쓸 때와 분노라는 말을 쓸 때와 분노라는 말을 쓸 때의 실제적 사용 용례는 다른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요즘 사회의 관심사가 된 언어, 이 '분노'는 그냥 사전적 의미의 화가 아니다. 우리가 요즘 분노라는 어휘를 사용할 때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상식선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합리성이 실종된 상황에서 그 일의 피해자가 우리가 되고, 나 자신이 될 때 우리는 분노라는 어휘를 쓰고 있는 듯하다.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가 '적합지 않게 부정의한 행동에 대해 보복하려는 것을 분노'라고 규정했다는 것을 보아도 분노란 일반적인 화가 누구러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로서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p-245)// 주) 1 '돼지엄마'란 사교육 정보에 밝고 교육열이 높아서 또래 학부모들에게 영향력을 생사하는 엄마를 일컫는다. 돼지엄마가 새끼 돼지들을 몰고 다니듯 다른 학부모들을 몰고 다니는 게 비슷하다 하여 돼지엄마라 불린다. 2014년에 국립국어원은 '돼지맘'을 그해의 신어로 발표했다. (p-249)

 

  차한선 _ 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화를 씹어 먹는 일이다

  올해에는 이상하게도 일명 '× ×노예 사건'들이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염전 노예 사건, 축사 노예 사건, 정비소 노예 사건 등.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노예라는 계급이 사라진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불리는 사건들이 계속 알려지고 있다. 난 아직 이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일이고 앞으로 어떤 경로이든ㄴ 계속 밝혀질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발달 장애인이나 지적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보여 주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전 국민 인식 개선운동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 여성에 대한 차별은 말로 해 뭐하겠는가? 특히 지적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정말 끔찍하다. 에잇, 말도 하기 싫다./ 얼마 전부터 내가 당원으로 있는 당에서 취저임금법상의 장애인 적용 제외 독소 조항을 폐지하고자 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취저임금법은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강제하는 법인데 이 법에서 장애인 노동자만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다. 이게 뭔가? 왜 장애인 노동자에게만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아도 되는가? 물론 법에는 "현저히 노동력이 떨어지는 자에게"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건 누가 어떤 근거로 판단하는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은 것이 이 조항이다. 그래서 이 법을 고치자고 거리로 나섰다. 많은 시민들은 이런 내용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우선은 알리는 것에 치중해 보자고 시작한 일. 그러면서 서명도 받았다. 지나면서 물랐던 걸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있어 고맙긴 하지만 화가 나는 일임엔 틀림없다. (p.255~256)

 

  김민우 _ 나는 무얼 말해야 하나…… 나를 말하는 말은 내가 아닌데……

  아마도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없던 이들이라도 장애등급제에 관하여 한 번쯤은 들어 봤으리라. 장애인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장애의 정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 기관의 의사라는 타자 단 한 사람에 의해, 장애의 정도에 소고기 돼지고기처럼 등급을 매겨 버리는 제도. 이 제도를 악용해, 없는 장애를 만들며 장애인처럼 행사를 하는 사기단까지 등장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2007년 장애인들에게 장애 등급을 재심사받을 것을 의무화했고, 지난 2009년에는 활동 보조 서비스를 신청하는 모든 장애인들에게 재심사받을 것을 의무화했으며, 시간이 흘러 내년 2017년에는 장애등급제를 기존의 6단계에서 '중증, 경증' 두 단계로 단순화하는 개선책을 내놓았다. 2007년, 2009년, 2017년 언제가 될지라도,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장애의 정도를 제시하기는커녕, 장애인 서비스 혜택의 총량조차 도무지 늘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참담하기 그지없다. 누구 말대로 이 나라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 지배 담론은,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기타 수많은 약자, 소수자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국민을 조삼모사도 이해 못하는 원숭이, 개, 돼지 따위의 짐승으로 취급하나 보다. 아, 그래서 남의 장애의 정도와 기준도 그렇게 멋대로 재단해 버리는 건가? (p.263~264) 

 

  김태경 _ 일본 사회와 분노

  올해 초 한 익명의 주부가 블로그에 쓴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뒈져 버려"라는 글이 예상치 못한 반향을 일으켰다. 도심부를 중심으로 보육원 대기 문제가 크나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재 일본의 모습이다. 어린이집에 해당하는 보육원 수가 모자라 아이를 맡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에서 여성 · 주부층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이를 계기로 사회 전반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를 여성들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앞서 본 안보 법안 반대 운동 때에도 많은 여성들이 "내 아이를 전쟁터로 보내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로 반대 데모 행렬에 함께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뒈져 버려"가 2016년도 유행어 대상 톱 10에 들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한마디로 현재 일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반대 의견이 다양한 입장에서 '분노'의 목소리로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p-272)사실 분노는 현재 우리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분노가 어디로 향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본 사회가 대체 어디로 향하는 '분노'를 크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일본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을까 한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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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16 겨울호 / issue          분노(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