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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2016 가을호 - 들뢰즈(발췌)

검지 정숙자 2017. 2. 5. 03:19

 

 

   『계간 파란』 2016 가을호             들뢰즈

 

 

     issue  들뢰즈(발췌)

 

 

 

  조정환: 내리쬐는 태양은 하나의 개체로서 나라는 개체에게 작용한다. 나와 태양은 외재적으로 구별되며 나는 태양의 작용을 받는다. 이에 대한 관념이 정서관념이다. 그런데 고흐는 태양과의 다른 관계를 구축한다. 고흐는 태양이 지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선이 수평선에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몸을 땅에 눕혀 일몰을 그린다. 이때 고흐는 태양과의 적합한 관계, 공통의 관계, 교감(communion)의 관계에 들어간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관념이 공통관념이다.(p-37) / 정서와 정동은 구별되지 않으며 구별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두 개념을 구분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동이론에 대한 비판자들이 대개 이 양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는데 정동이론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 양자의 구분이 없거나 모호한 경우를 드물지 않게 발견한다. 하지만 정서와 정동의 구분은 정서 관념에서 공통 관념으로, 개체에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디딤돌이다.(p-46)

 

  김석: 들뢰즈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더 이상 없다. 언표 행위의 주체도 없다. 흐름만이 욕망의 객관적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강도적 차이를 갖는 기계들(machines)이 있을 뿐이다. 들뢰즈가 욕망의 담지자를 주체가 아닌 기계로 가정하는 것은, 욕망이 비인칭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해체하기 위함이다. 들뢰즈의 의도는 욕망 개념에서 모든 인간적 함의를 배제하고 욕망을 주체와 분리하여, '비인격적이고, 전개인적인 초월론적 장'에서 발생하는 생명 자체의 활동으로 재규정하는 것이다.*(p-57,58) (각주 7, 책에서 참조. p-73) / 라캉에게 결여는 대상이나 실제 경험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재현의 질서인 상징계를 벗어나는 탈존(ex-sistence)과 관련이 있다. 라캉은 결여에 대해 "결여는 이것저것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 결여이고 그것을 통해 존재가 실존한다"*라고 말한다.(각주 20, 책에서 참조. p-74) 욕망이 결여라는 것은 욕망의 본성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맺는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라캉은 생산에 대해 말하지는 않지만 결여가 적극적인 역능(power)임을 마찬가지로 강조한다. 다만 들뢰즈가 긍정성(positivity)과 차이의 펼쳐짐과 흐름을 강조한다면 라캉은 공백을 통해 재현의 질서에 욕망이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질서가 욕망을 통해 창조되고 뒤집어짐을 역설한다. 공백이 충만함을 만든다.(p-64)

 

  김창환: 잘 알다시피 문학에 관한 들뢰즈(와 과타리, 이하 DG)의 본격적인 논의는 카프카에 관한 것이었다. (마조흐(Sacher-Masoch)에 대한 초기 논의는 여기서 일단 지나가자.) 그들에 의하면 카프카는 엘랑콜리에 사로잡힌 신경증 환자도 아니고 고통에 잠긴 신비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정치적 작가였으며 DG가 주장한 '비주류 문학(minor literature)의 전범적 사례였다.* (p-84) (각주 2, 책에서 참조. p-101) / 들뢰즈의 '지역문학'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의 논의를 문학의 '기능'으로 이끈다. 사실 DG가 카프카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의 작품에 숨겨진 의미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글쓰기의 '기능'이었다: 언어를 탈-영토화하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권력 연관들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발화 행위의 집단적 배치(collective assemblage of enunciation)를 활성화하는 그 '기능'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의 코퍼스는 '기능적 실체(functional entity)'로서 말 그대로 '글쓰기 기계(writing machine)가 된다. 카프카의 소위 '기계적 요소(machinic elements)'는 세 가지이다. 편지, 단편소설, 소설. 물론 여기에 우리는 그의 일기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DG가 만약 언어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순간에 언어 속에 담겨 있는 모든 명령어들, 함축되어 있는 전제들, 혹은 발화-행위의 집합"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신체들에 속성을 부여하는 모든 비신체적 변형의 집합"(Deleuze and Guattari, 1987, pp. 79-80)이다. (p-87)

 

  이진경: 예술가는 자신이 어떤 사건을 통해 포착한 감응이나 감각을 응결시켜 작품을 만든다. 뒤집어, 작품이란 예술가가 포착한 어떤 감응이나 감각이 응결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것과 만나는 독자가 관객, 청중에게 어떤 종류의 감응이나 감각을 산출할 것이다. 보는 자, 읽는 자로서의 나는 그런 식으로 작품 속에 들어감으로써 감각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들뢰즈가 인상주의자와 세잔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감각이란 "대상을 떠난 빛과 색의 유희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라 할지라도 성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들뢰즈 『감각의 논리』p.64.) (p-118,119) 예술은 항상- 이미 다른 기념물을 만든다. 감각적 체험이란 이처럼 만나는 다른 감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란 점에서 그 자체로 내재성을 갖는다. 들뢰즈가 감각이란 말 자체를 '이행'으로 정의했던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메를로 퐁티가 지적했듯이, 이런 감각적 만남과 혼합이 가능하려면,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들이 있어야 하며, 그 신체들이 만나고 섞이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신체들의 질료적 일의성(univocite)이 있어야 한다. 이런 질료적 일의성을 들뢰즈는 메를로 퐁티의 개념을 빌려 '살(chair)'이라고 명명한다. '살'은 개별적인 신체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신체들이 갖는 어떤 '물질성'이다. 여러 신체들이 만나고 섞일 수 있는 단일한 '속성'의 연속체다. 이를 표현하고자 메를로 퐁티는 '세계의 살'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살'은 지각이나 감각이 가능하게 해 주는 '질료적 실험성'이다. (p-131)

 

  박정태: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라베송(Ravaisson)에 대해 기술하면서 지적한, 색조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규정하는 한 방식을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색조들로 하여금 그 색조들을 하나의 동일한 점에 모으는 볼록렌즈를 통과하도록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색조들 간의 차이를 드러나게 했던 순수한 백색광'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색조들은 더 이상 개념(백색광) 그 자체의 뉘앙스들 또는 정도들이다. 말하자면 색조들은 이제 차이 자체의 정도들이지, 정도의 차이들이 아닌 것이다. 아울러 이때의 백색광과 색조들 간의 관계 또한 더 이상 논리적인 포섭으로부터가 아닌 분유로부터 온다. 물론 백색광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보편적인 무엇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개별 색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백색광 그 자체가 각 개별 색조의 끝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백색광은 (색깔이라는 유개념처럼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대상과 따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무엇이다. 말하자면 사물들이 개념(백색광)의 뉘앙스들 또는 정도들이 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개념(백색광) 그 자체가 또한 사물들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여기에서는 대상들이 자기 스스로를 수많은 정도로서 그려 내기 때문에, 개념(백색광)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보편적인 어떤 것이되, 결코 하나의 유나 일반성은 아닌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p-153) (각주 10, 책에서 참조. p-158) / 바디우에게 있어서 존재는 결코 들뢰즈 식의 생산 역능이 아니다. 존재는 그 어떤 일자(하나)도 배제한 채 그저 불안정하게 펼쳐진 아무런 속성도 없는 무한 다수, 말하자면 수학적 집합론에서의 원소와도 같은 그런 순수한 무한 다수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 있는 바디우가 보면, 들뢰즈는 분명 일자의 철학자다. 내재적 생기주의에 기반한 일자의 철학자 들뢰즈! 들뢰즈와 바디우, 이 둘 사이에는 따라서 접점이 있을 리 없다. 결코 토론이라고 할 수 없는, 오로지 논쟁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고백처럼 이 둘 사이에는 오로지 철학적 선택만이 있었을 뿐이니까….* (p-157) (각주 12, 책에서 참조. p-159)

 

  장철환/ 리토르넬로의 세 가지 측면이 선형적 · 인과적이 아니라 동시적 · 혼합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에 의해 음악과 예술, 나아가 세계와 우주가 생성된다. 특히 카오스로부터 질서가 생기고 그것이 다시 코스모스의 힘에 합류하는 생성의 과정의 중심부에 리토르넬로가 작용한다.(p-166) / 한편 "<리토르넬로>의 세 가지 측면"은 방향적 성분과 하위-배치물, 차원적 상분과 내부-배치물, 이행적 성분과 상호-배치물이다. 여기에는 '카오스의 힘', '대지의 힘', 그리고 '코스모스의 힘'의 상호 작용이 내재한다.(p-166) / 리토르넬로는 영토화,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성립"시키는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p-171) / 서명되지 않은 환경의 성분은 영토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성분인 재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의 질료가 되는 '표현-되기(devenir-expressif)'가 중요하다. 표현-되기야말로 진정한 "영토화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표현-되기로서의 예술이 영토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p-171)

 

  조강석/ 이 블로그작고 시인의 시편에 <정지용, 고향」>과 함께 수록함.

 

  정한아/ 감각에 대한 욕구와 법을 조롱하며 편법적으로 취하는 마조히스트의 부가적인 쾌락의 극단에서 세브린은, "망치가 되느냐 아니면 얻어맞는 모루가 되느냐' 하는 이분법적인 논리 안에서 모루가 되기를 자청했다가 마침내 그 환멸에 의해 망치로 변모한다. 시글러의 결론과 같이, 만일 마조히즘 이론이 독서 행위 이론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의 부가적인 사항을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만들어 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고통의 수업료가 생각보다 훨씬 비쌀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읽어 버린 이상, 당신은 변모하기 시작했고, 당신이 진지하게 읽어 버렸다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  "감각적인 욕구에 의한 사랑"을 묘사하면서 속이 울렁거리던 들뢰즈는 더 이상 「냉정함과 잔인성」을 쓰던 들뢰즈가 아니다. 바틀비처럼 논쟁을 회피하던 그는("질들뢰즈는 논쟁을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젠가 들뢰즈는 이렇게 썼다. 진정한 철학자는 카페에 앉아 누군가가 '이 점에 대해 좀 논쟁합시다'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최대한 빨리 달아난다고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저, 김지훈 외역,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 도서출판b, 2006, p.7.) 카프카의 단식 돵대처럼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지는 대신, 영원회귀의 미래 시간을 자기 손으로 끌어당겨 카오스모스 속으로 자기를 던졌던 것이다. 그는 망치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p-242,243) 

 

  이찬/ 이 블로그【잡지에서 읽은 시편에 <노춘기,「바람이 불어오는 곳 2」>와 함께 수록함.

 

  기혁/ 이 블로그【잡지에서 읽은 시편에 <서윤후,「에너지」(『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과 함께 수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