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住의 저녁
이은경
사람들보다 먼저 이사를 온, 키 큰 나무들이 길 건너 아파트 신축
부지에 길게 누워 있다
이주의 첫 저녁이 오고, 설렘과 불안이 뒤엉킨 나무의 잎사귀들이
저녁의 무늬에 스민다
귀란 귀를 모두 열어 놓고 눈을 감으면, 베고 누운 손바닥의 손금
사이로 땅 밑의 숨소리들이 올라온다
뒤늦게 자신의 뿌리에 새겨진 흙의 지문들을 생각하며 끊어진 뿌
기 끝에 퍼지는 통점과 정처 없음에 몸을 동그랗게 만다
뿌리가 뽑힐 때 생긴 커다란 웅덩이가 제 몸 안에 들어앉는다 유적
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가 바람의 냄새가 나무의 귀를 간질이
는 저녁, 새들이 날아간 곳은 어디쯤인가?
유적은 여기에서 멀고, 이미 시작된 제 안의 그리움들이 나이테 한
가운데에 작은 흑점을 남긴다
누워 있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 새로운 정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
듯 석양이 물든다 아침이면 울타리에 집을 짓겠지 뿌리마다 새로운
흙의 지문들이 생겨날 것이다
누워 있던 자리에 제 그림자를 늘이는 저녁이 오면, 오래된 유적을
향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팔랑이겠지 그런 저녁에는 그리움의 잎사
귀들이 나의 골똘한 저녁 창에 스미기도 하겠다
누운 나무들의 이마 위에 바람이 분다, 동여맨 나무의 뿌리마다에
그리움처럼 별빛이 내려앉는다
내 귀가 누운 나무의 귀에 바짝 붙어 있다
* 계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1. 11~12/ 신작특집에서
* 이은경/ 충남 천안 출생, 2003년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러기/ 강태열 (0) | 2011.02.07 |
---|---|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 김승희 (0) | 2011.02.06 |
가죽 방패/ 김백겸 (0) | 2011.02.04 |
만년필/ 송찬호 (0) | 2011.02.03 |
사과나무, 푸른 가계(家系)를 읽다/ 이영식 (0) | 2011.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