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명(別名)
이원성(李源星)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름이 있다.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런데 그 사람을 일컫는 이름은 한 가지만이 아니다. 통칭(通稱)으로는 아명(兒名)과 관명(冠名)이 있으며, 이명(異名)으로는 자(字)가 있고, 모든 사람이 다는 아니나 호(號)도 있다.
아명은 성인이 되기 전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이요, 관명은 성인이 된 뒤에 부르는 이름이다. 아명을 가정적 이름이라 한다면 관명은 사회적 이름이다. 자와 호는 가정과 교우(交友)와 사회적으로 두루 이름 대신에 쓰는 별칭(別稱)이다.
어떻든 아명과 관명과 자와 호는 모두 공식적인 이름인데, 이보다 또 다르게 별명(別名)이란 게 있다.
이 별명은 한 조직체 내에서, 또는 어떤 계층이나 부류 안에서 불리는 이름 아닌 또다른 이름인데, 그 사람의 특징이나 위상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이를테면 말 잘하는 사람을 '변호사', 몸집이 굵으면 '뚱보', 코의 모양새가 뾰족하다 하여 '낚시코', 몹시 인색한 사람을 '구두쇠'라 하는 등 성격이나 신체적 특징을 들어 짓는 것이 보통이다.
이 특징성이 해학적으로 그 사람에게 잘 어울리어 애교가 있어 듣기에도 좋은 애칭(愛稱)으로 들리면, 굳이 나쁘다 할 것 없어 본명보다 더 애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속하여 혐오감을 주는, 삼자가 들어도 그리 좋지 않게 느껴지고 장본인이 들으면 화를 내게 하는 천덕스럽고 고약한 비인격적인 별명도 많이 있다.
나에게도 평생을 살아오면서 얻은 별명이 많다. 40여 년을 교직에 근무하였기에 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명이 하나씩 붙곤 하였으나 그것을 다 기억할 수 없거니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하던 성장기 때, 같은 또래들이 지어 부르던 듣기에 그리 유쾌하지 못한 별명이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소학교 때 얻은 별명이다. 학교에 입학한 첫날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을 호명하면서 내 이름을 '이원생'이라 불렀다. 그 선생은 경남 출신으로 '원성'의 발음이 '원생'으로 습관화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그랬을 것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까르르 웃었고 나는 부끄러워 홍당무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이렇게 하여 첫날부터 내 별명은 '원숭이'가 되었고 그것이 6년 동안 따라다녔다.
나는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로 그 별명이 싫었다. 내 이름을 하필이면 '원성'이라 지었느냐고 아버지를 속으로 원망도 했었다. 그러나 내성적이던 소년기의 나는, 내 별명을 부를 때마다 내가 애달아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던 그들 급우들에게 대들어 싸울 수도 없어 그냥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원숭이'라는 별명이 사오 학년 때에 '짜루'로 변했다. 일제(日帝)의 우리말 말살정책으로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일본말만을 상용하도록 했다. 만약 한국말을 쓰는 것이 발각되면 호된 벌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우리말을 안 쓸 수 없으니, 우리말을 썼다고 고발하여 친구들을 골탕 먹이는 웃지 못할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 내 별명도 이에 맞추어 일본말 '사루(さる)'로 변했고, 그것이 너무 밋밋해서였는지 다시 악센트를 주어 짜루'로 변했던 것이다. 이렇게 변한 '짜루'가 나에게는 '원숭이'보다 듣기가 나았다고 한다면 난센스로, 이것도 하나의 비극이라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다음 다른 하나의 별명은 '되놈'이었다. '되놈'이란 중국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내 기질이 중국사람을 닮아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니 나로서는 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그로 하여 중학교의 교복 모양이 바뀌고 색깔도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국방색(카키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했다.
전쟁 말기 일본의 단말마적인 수탈과 종전 후 경제 혼란으로 우리 집은 심한 가난에 쪼들려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생계가 곤란했다. 그러니까 교복을 새로 장만한다는 것은 대단한 부담이었다. 어머니는 궁리 끝에 무명 자투리를 모아 교복을 손수 지었다. 그러나 염색이 문제였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어머니는 염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먹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집 안에 있는 쓰다 남은 먹을 다 모으고 친지 집에 먹 동강이를 얻기도 하여, 벼루에 갈아서 그 먹물로 염색을 하였다.
색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회색보다는 진한 검은 색의 흉내는 내게 되었으나 옷의 모양이나 색깔이 전혀 근처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애쓰신 마음과 쏟아부은 정성에 감동되어 이만하면 됐다고,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그대로 입고 학교에 갔다.
그러나 그 교복은 입을수록 색깔이 퇴색되었다. 소낙비를 한 번 맞고 나니 검은색은 거의 빠진 듯 푸르죽죽한 빛으로 변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그냥 입고 다닐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교복의 색깔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되놈'이란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었다. 창백한 얼굴에 검지도 푸르지도 않은 괴상한 색깔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모양이 중국인 같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초라한 몰골이었던 것이다. 이 슬프고 아픈 별명이 내 마음의 상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리 듣기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야, 되놈!" 하고 부를라치면 나는 '남의 아픈 곳을 찌르는 네놈들은 되놈보다 더 못한 오랑캐놈이다'고 마음속으로 내뱉으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왜 이 자식아?" 하고 대답했으나, 가난이 끝내 원초적인 비극일 수는 없다고 입을 꼭 깨물곤 했었다.
그 옛날 소년기 때의 그렇게 듣기 싫던 별명을 다시 회상해 보니 돌아가신 어버이 생각이 간절해진다. '원숭이'라는 별명은 아버지가 오행(五行)을 맞추어 작명해 주신 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요, '되놈'은 어머니가 그 찌든 가난 속에서 정성을 다하여 손수 만들어 주신 고마운 교복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그러니 그 별명의 바탕에는 내 부모의 사랑이 담겨 있고, 우리 집 삶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것을 깨달은 것은 기년(耆年)이 된 뒤다. 철이 늦게 들었다 하겠지만 요즘은 그 두 별명을 회상할 때마다 시전(詩傳)의 육아시(蓼芽詩)를 읽는 것처럼 가슴이 찡해지곤 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육십여 년 전의 마음 아팠던, 그리고 불쾌했던 그 별명을 돌이켜 생각하니 오히려 그것이 아름답고 영광된 것이었다고 느껴지며 그리워지니 어찌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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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16-11월호 <수필>에서
*이원성(李源星)/ 1070년 <영남수필> 동인활동으로 등단, 수필집 『뜻을 잃은 언어들』『오후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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