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
박두진(1916-1998, 82세)
산새도 날라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느리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사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전문-
▶ 사유의 샘을 파는 서정시인|박두진의 시세계(발췌) _ 고형진
이 시는 제목부터 사실적이다. 그의 다른 자연시편들이 대체로 그냥 '산'이란 시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이 시는 '도봉'이란 산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의 묘사도 사실적이다. 이 시는 가을날 해질 무렵의 고즈넉한 도봉산의 정취를 그리고 있다. 붉은 해가 넘어가고 별과 밤이 온다는 진술도 사실적이다. 이 시는 시인이 도봉산을 바라보며, 그 산의 정취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3연을 제외하곤 각 연이 모두 2행으로만 되어 있는 것도 박두진의 다른 시와 차이나는 점이다. 1연 2행의 시 형태는 정지용 시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 시는 여백이 아주 많으며, 그 여백은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해질녘 가을 산의 정적을 반영한다.
이 시는 관념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실재하는 자연을 그리며, 짧은 호흡에 여백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박두진의 다른 시와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이 시가 자연을 묘사하는 데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자연에서 떠오르는 어떤 정취나 풍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도봉산의 정적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을 간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사랑'은 꼭 이성을 지칭하는 것만으로 보기 어렵다. 시의 문맥으로 미루어 이 시에서 '그대'는 사랑을 포함해 시인이 되찾기를 바라는 그 어떤 간절한 대상들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우리는 박두진의 자연친화적인 서정시에 시인의 사유가 깊게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협소한 서정시의 울타리에 깊고 큰 사유의 통로를 마련하여 우리 서정시의 용적을 크게 확장시킨 것, 그것이 박두진 시가 한국 현대시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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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2016-11월호 <기획특집|탄생 100주년의 문인들>에서
* 고형진/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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