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이영도(1916-1976, 60세)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전문-
▶ 모진 그 세월 안으로 영근 사랑/ 이영도 시조의 다양성과 깊이(발췌)_이승하
사흘 동안 솥에다 무엇을 넣고 끓인 적이 없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늦봄에 해는 길고 겨울 양식도 봄 양식도 없으니 굶어죽기 딱 좋다. 감꽃을 주우며 놀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지만 거기에 도대체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전국적으로 아사자가 속출해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으니 1940년대나 1950년대, 그리고 1960년대 전반기에는 보리를 베기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무척 힘겨웠다. 시인은 고향을 생각하면 보릿고개가 당장 생각났던 것이고, 아픈 추억담을 짧은 시조 속에 완벽하게 녹여 넣음으로써 이 작품이 이영도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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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2016-11월호 <기획특집|탄생 100주년의 문인들>에서
*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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