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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사유-시론/ 김안

검지 정숙자 2016. 10. 11. 23:37

 

 

기획성 우리 시대의 이미지-사유(Bild-Gedanken) 4

 

 

    이미지-사유-시론

 

    김안

 

 

  맑은 눈

  출근길, 구로디지털단지 역 앞에는 종종 신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나는 천천히 그들의 눈을 쳐다보기 위해 발길을 늦춘다. 그들의 눈을 맑다. 그 맑음은 곧 믿음의 강도이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사상적 믿음이든, 믿음은 강하면 강할수록 고집 센 무지로 향한다. 신이 기식하는 곳은 바로 그 무지의 눈동자 속이다. 그리고 이 광폭한 자본주의 시대에도 여전한 그 맑은 눈동자는 곧 무지로 둘러싸인 감옥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동시에 자연스레 맑고 무지한 감옥일 뿐인 우리의 시대의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의 눈동자가, 그들의 눈동자가 응시하는 것은, 더 이상 이 감옥 너머의 신이나 종교가 아니다. 따라잡을 수 없는 이 시대의 속도와 가정이라는 유사종교, 매스미디어가 제공하는 판타지의 위인들이 우리에게서 신을 앗아가버렸기 때문이다.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믿음 따위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신은 없고 광신도만이 존재하는 삶이 있다면, 신이 업는 것을 알면서도 광신도가 되어야 하는 싦도 있다. 

 

 

  망각의 신

  지하철 역 앞에서 신을 외치는 이들은, 이 현실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지옥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외친다. 그들은 그 지옥을 타파하기 위하여 현실이라는 지옥을 내면에서 지운다. 이제 신은 현실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이 부여하는 고통과 고통의 연대와 대물림들 위에 덧씌운 망각의 당의정일 뿐이다. 현실을 극복하고 내면을 개혁하는 종교는 더 이상 우리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그저 현실로부터 눈을 감기 위한, 현실을 잊기 위한 종교만이 지금의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신이 만든 종교사 혹, 종교가 만든 신이 싱싱하게 해주는 이상향보다 현실이 상상하게 해주는 더 나은 지옥이 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는 삶. 그것이 우리네 삶이 가까스로 품을 수 있는 희망이다. 바로 더 나은 지옥.

 

 

  더 나은 지옥

  역사 속 모든 이들에게 당대는 늘 지옥일 뿐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과거는 없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그것은 그저 더 나은 지옥을 향한 진보일 따름이다. 더 나은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지옥은 지옥일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 신은, 신을 대신하는 자본주의적 행복-판타지는 우리 내면의 통각을 마비시켜 현실이라는 지옥의 고통을 잊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이 지옥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는 그 불길을 백지 위에 현현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시 속에서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 또한 바로 지하철 앞에서 본 광신자들의 눈빛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로써 더 맑고 무지해지는 것. 시안에 갇혀 현실이라는 지옥의 불길과 마주하는 것. 이생의 끝에서 보게 될 더한 지옥과도 나뒹구는 것.그러므로 시인은 때론 철저하게 무지해야 한다. 철저하게 무지하기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비평가도 독자도 출판자본도 동료 시인도 자기 자신도 두려워 하지 않기 위해, 시인은 자신의 눈동자를 때론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광신도의 그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광신도는 절대적 순응이 아니라 저항과 투쟁과 존재하지 않는 신을 향한 순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저항, 투쟁, 순교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나아간다는 것. 수많은 선배와 선생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하는 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다름없다.

 

 

  난해

  어떤 철학적 사유가 갑작스레 돌올해지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 절대 드러내지 않는 선명한 고통과 극적으로 조우했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극적'이기 때문에 그런 순간은 쉬이 발현되지 않는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우리는 그것을 추상적으로  그리워하거나 지식으로 공부할 뿐이다. 혁명이라는 노스탤지어. 그것은 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에게 요구하는 신성 더 이상 무소불위의 전지전능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망각일 따름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신에게 요구되는 망각은,이제 신이 아니라 미친듯 번쩍이는 도시의 네온들, 그 '순간'의 속도들이 대신하고 있다. 영원한 고통과 영원한 고통과 영원한 고통의 대물림과 극복할 수 없는 영원한 계급을 지우는 망각의 빛으로 가득한 이 순간의 아미지들, 때문에 시는 그 순간의 멱살을 부여잡고, 그 순간을 한없이 늘어뜨려야 한다. 결국 난해, 소통불가 등은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순간의 망각들을 한없이 늘어뜨리기 위한 가장 즉각적인 방법인 셈이다.

 

 

  연기

  때문에 문제는 난해가 아니다. 직정적으로 말하자면 난해한 척, 철학자인 척, 혁명가인 척, 윤리적인 척, 양심적인 측, 공부한 척, 예술인 척, 최선을 다한 척, 그리고 악한인 척, 사람인 척이 문제이다. 지면과 대중과 자신이 맞대고 있는 백지 앞에서의 가짜 표정들이 문제이다. 가짜라도 훌륭히 연기하면 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연기에 골몰하고 있을 테지만, 그마저도 서투르기 때문이다. 진짜기 되기 위해 진짜처럼 연기하는 것. 그리고 그 연기의 과정 속에서 (물론 시는 무기가 아니고, 무기가 된다 한들 세상과 싸우지 못하고, 그것은 세상에 익숙해지려는 나 자신과 싸우는 무기일 뿐이지만) 시 속의 어느 한 문장과 단어, 이미지 등이 아주 우연히, 비록 무기가 아니더라도 뾰족한 바늘 끝이라도 되는 것. 그것은 연기에 더울 골몰할 때라야만 운 좋게 얻게 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척'이 아닌 '연기'가 필요하고, 이 연기가 훌륭할스록 스타일을 획득하고,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운 좋게 얻게 되는 그 행운을 평생 기다리며 연기에 골몰하며 스타일을 갱신해나가는 것이 지금 이 시대 시인의 삶일 뿐이다.     

 

  

  기형들

  망각을 향한 순간의 이미지들은, 종국에는 주체를 지운다. 주체는 순간순간의 광폭한 속도에 휘말려 흩어져버린다. 겨우 그러모은다고 한들, 그 주체는 사지가 엉뚱한 곳에 붙은 기형의 형상일 뿐이다. 온전한 형상은 매스미디어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형상이다. 그 현란하고 재째빠른 가상의 형상들을 좇다가 우리는 늙거나 숨 막히거나 지쳐서 죽는다. 그것은 주체보다 시대의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이 시대는 빠르게 흐르고 변화하고 변화를 요구하지만, 생활은, 생활의 비루함은 느리게 지속되고 유지된다. 주체가 올바른 형상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은 온전하다고 인지하는 그 형상이 결국 가상이기 때문이고, 주체의 형상은 기껏해야 기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는 그 자신이 온전하다고 인지하고 있는 그 형상이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자신이 기형인 것은 쉽사리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극을 인정하지 못하는 주체는, 타자의 비극에 감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세월호 참사와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문제, 사드에 관련된 문제 등 현 정권과 지난 정권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목도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그그우로부터 눈을 감고 타락하고 악마가 되어가는 가족과 선생과 친구들을 통해 똑똑히 목도했다. 지금 이 시대에 시가 시작하는 장소는 바로 여기이다. 난해가 시작되는 장소는 바로 여기이다. 그것은 난해가 아니라 기형들이다. 기형들의 윤리이다.

 

 

  속도

  하지만, 이 속도 또한 이미지이다. 우리가 느끼는 세계의 속도는, 물론 실제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양상이지만, 하나의 고정된 형상일 뿐이다. 그것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집착이고, 열등감에 대한 보상심리이다. 자본주의적 삶이 속도를 강요하는 것은, 속도로 인하여 우리가 주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시스템도 이 세계를 무한정 더 빠르게 운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다. 때문에 속도는 이미지가 되어, 우리의 의식 속에 고착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속도는 곧 생존, 속도는 곧 성공, 속도는 곧 영속적 가치, 그리하여 속도는 곧 악, 속도는 곧 타자를 향한 무관심, 속도는 곧 무기, 수많은 수식어와 관념어들이 이 속도에 붙어서 기식한다. 이 수식어와 관념어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더께를 더욱 두껍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네 생활은 더디거나 고여 있거나 퇴행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첨단과 날개 없는 유령이 뒤섞여 있다. 그것은 생활의 항상성 때문이다. 속도의 이미지가 주체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생활의 항상성을 망각시켜야 한다. 때문에 하나의 주체가 그가 속한 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생활의 항상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 미적 혁신이든 아방가르드든 실험적 예술이든 그 근간에 생활이 받쳐져 있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생활

  여기에서의 생활은, 가정에서의 생활이나 의식주의 윤택함 등으로부터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항상성을 지키고자 하는 생활은 주체의 의식을 벼르는 삶에 대한 태도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말은 자칫 탈속으로 비쳐져 윤리적인 폭력이 되기도 하겠지만, 시에는 분명 이러한 '생활'이 필요하다. 생활과 시, 우리가 고전이라 일컫는 작품들은 바로 이 지점들을 획득한 것들이다. 당대가 억압하는 생활을 철저하게 재현해 내는 것 말이다. 텍스트들을 매개로 한 당대와 생활의 항상성의 전장, 물론 그 재현의 방식은 다양하다. 그 다양함이 저마다의 사조를 만들고 에꼴을 만든다. 그리고 그 다양함들이 저마다의 다양성을 잃고 패턴화 될 때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되다가 사멸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망각이 불러일으키는 타락의 안온함 속에서 점차 악마가 되어가는 사람들과 뒤엉켜서도 자신의 생활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시대의 속도에 반비례하는 운동에 가깝고, 어쩌면 이 시대의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시인은 사조적으로든, 장르적으로든, 시가(詩史)적으로든 그 어떠한 체계화된 범주로부터 끝없이 미끄러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체온이 식어버린 어느 한 공간에 고정되는 순간, 텍스트는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변질되고, 텍스트만을 위한 텍스트를 생산할 뿐이다. 그리고 고정된 공간에 속박된 시인은 결국 끝없는 자기복제를 언어의 해방이라 여기며 위악적인 괴물이 되어갈 뿐이다.

 

 

  윤리의 구조

  벤야민은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중략)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형이기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길, 2007,227쪽)이라 말했다. 그리고 열악한 작가는 수많은 착상들 속에서 기력이 탕진하고, 냉철하지 못하다고 첨언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훌륭한 작가의 기준이 아니라, 작가로서 가져야 할 윤리이다. 말에 대한 윤리, 언어를 다루는 이로서의 윤리, 하지만 이 윤리를 쓰기의 육체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번뜩이는 섬광으로 가득한 청춘의 영역이 아니라 명상과도 가까운 비판적 관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마저 저마다의 윤리가 있고, 시대를 초월하는 윤리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윤리'가 되었는지, 그 '윤리-됨'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에 대한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다. 윤리의 구조가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통로, 그리고  더 나아가 윤리가 결국 폭력이 되는 변모 과정, 왜냐하면 이 시대에 있어서 모든 세대와 지역, 성별을 통어하는 유일한 윤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제 우리는 저마다의 윤리를 들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싸우는 것, 결국 윤리는 증발하고 싸우는 행위만이 남을 뿐이다. 그것이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한 톨의 윤리이다.

 

 

  욕망 없는 싸움

  결국, 나는 이 수많은 착상들 속에서 갈피를 잃으면서도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싸우라, 부끄럽지 않도록, 비열하지 않게. 아무런 욕망 없이 맑고 무지하게. 신이 없는 걸 알면서도 광신도를 택한 이들처럼 절대적인 세속과 싸우라. ▩

 

 

  (※ 참고)  

 企劃性/ 우리 시대의 이미지-사유(Bild-Gedanken)에 실린 글

  기획의 말_조강석

  이미지_사유의 역사성과 현대성_정의진 1

  빛이 파괴된 세계의 잔존하는 빛_송승환 2

  이마골로기(imagologle)-이데올로기가 된 이미지의 비극_조동범 3

  이미지의-사유-시론_김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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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2016-9월호 <기힉성 | 우리시대의 이미지-사유(Bild-Gedanken)> 에서

 * 김 안/ 시인, 1977년 서울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오빠 생각)』『미제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