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의 시 한 편>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한용운, 『님의 침묵』, 회동서관, 단기 4259년(서기 1926년), 28쪽
만해 시의 고찰(발췌) : 이병석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득 안았을 때 그 격정의 무게에 굴복하는 것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美의 창조'라고 읊조리며 가치 창조의 길로 회향시키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드러 부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이별과 슬픔, 극심한 핍박 아래서 끈질긴 신념과 결곡하고 힘 있는 정서로 시를 엮어간 시인으로 우리에게 인상 지워진 만해였다. 이런 면에서 만해 이후 지금까지 만해를 넘어선 의지적 정서를 펼쳐낸 시인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 시 「나룻배와 행인」은 그런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것 같다.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같은 대목에서 만해 시에 대한 통념의 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느낌, 그와 너무나 동떨어진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참고 견디며 버티는 그 집념의 정감을 찾아볼 수 없다.
첫 연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의 대목에서 나룻배와 행인 사이에 결곡한 인연 설정이 없어 그저 덤덤하다. 이런 점이 여타 만해 시들과는 다른 점인 것 같다. 결곡한 정감 격한 어조가 보이지 않는다. 또 생각해봐야 할 점은 화자가 "행인"이 아닌 "나룻배"라 시 전체에 "행인"의 말 한마디 없고 의인화된 "나룻배"만의 모놀로그로 진행되고 있다. 화자는 오직 "나룻배", "행인"은 다만 청자의 입장이다. 그런데 강이나 호수 때로는 바다를 건널 때 "나룻배"가 있다면 사공이 있어야 "행인"이 물을 건널 수 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사공의 등장이 없다. "나룻배"는 "행인"을 안고 저(나룻배)를 부리는 사람(사공) 없이 물을 건널 수 없다 할 것이다. (p.289~289)
3행의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란 대목은 업연(業緣)에 따라 각각 겪게 되는 여정에 나타나는 심상(心相)의 깊이 여하와 성격을 표현한 것으로, 어떠한 형태나 성격, 천심(淺深)을 망라해서 다 건너가게 되는 당연성을 그린 것이라 보아진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피력한 장면은 "행인"을 향한 "나룻배"의 숙명적 기다림의 속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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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첩』2016-봄호 <심층의 시 한 편>에서
* 이병석/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저승돌』『달의 꿈길』『고구려 옛 하늘을 날아』『비단길에 흐드러진 얘기꽃』(기행수상집)이 있음. 부산문학상, 실상문학상, 부산예술대상 수상. 현재 천룡사 주지. 부산문협자문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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