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성찬경(1930~2013, 83세)
-전문-
우리말 중에서 빛을 나타내는 말에는 영락없이 'ㄹ'이 들어 있다. '불'이 그렇고 '별'이 그렇다. 서양 말도 그렇다. 'light'가 그렇고 'illumination'도 그렇다. 필경 깊은 원리가 숨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며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이 시 「달」은 시의 제목도 본문도 모두 이 '달'이란 말 하나에 담아져 있다. 그러니 이 시도 정진정명(正眞正銘)으로 내가 요즈음 시도하고 있는 '일자일행시' 일명 '절대시'다.
서양 미술의 인상파(印象派)를 흔히 외광파(外光派)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가 샤갈은 이를테면 햇빛의 외광파가 아니라 '달빛의 외광파'라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빛에 대한 샤갈의 감도(感度)가 그만큼 섬세하다는 말이 되겠다. 달빛 받아 아련히 떠있는 세계는 선명도 높은 낮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꿈의 환경이다. 삶의 파란을 웬만큼 겪은 이 치고 반쯤 비치는 병풍 두른 이러한 환경에 끌리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이 밤도 나는 달빛 받으며 너무 눈이 부셨던 낮의 광란(狂亂)을 엷고 결고운 한(恨)의 무늬로 변용(變容)시켜, 사랑의 상처에 어스름 향유(香油)를 바르리라. 달 둘레 멀리 퍼지는 보랏빛 우수(憂愁)로 나의 시정(詩情)을 포근히 덮으리라.
해설, 도입부> 밀핵시의 정점을 향한 기나긴 여정: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
성찬경 시인이 아홉 번째로 펴내는 시집(시선집 제외)의 제목은 '해'이지만 시집의 제목 밑에 적혀 있는 타이틀에 그 무엇보다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찬경일자시집' 마침내 밀핵시론(密核詩論)의 완결판이 2009년이 다 저문 지금 이 시점에 나오게 된 것을 까마득한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경외심을 갖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일자일행시 「해」가 발표된 것은 1992년 여름호 『현대시사상』이므로 17년 만의 결실인 듯하지만 우리말에 대한 실험 공법이 『화형둔주곡』(1966)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근 45년 만에 시인은 한국시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작업을 이제 막 끝낸 것이다. 시인의 밀핵시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표제시 「해」에 대한 소감부터 밝히고 싶다. 시의 전문은 없고 제목 '해'가 전부다. 제목 아래 본문은 없지만 각주가 하나 오른쪽 하단에 붙어 있다. '해'라는 한 글자로 된 순우리말에 대한 시인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이 시의 본문을 대신하고 있다.
후기, 발췌> 절대시 오른 편에는 산문시 풍의 풀이가 붙어 있는데, 이렇게 한 것은 독자 여러분의 시 감상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다. 이 풀이를 시의 일부로 보는가, 아니면 보충적 설명에 머무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 이렇게 설명을 다는 것조차도 군더더기같이 여겨져 정말로 글자 하나만으로 시를 꾸며본 것이 모두해서 33편이다. 나는 이런 시를 특히 '순수절대시(純粹絶對詩)'라 이름 붙여 분류하고 있다. 이 '순수절대시'의 여백은 독자 여러분께서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이야말로 여러분을 위해 개방된 침묵의 텍스트(text)다. // 2009.12. 성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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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경일자시집『해』에서/ 2009.12.21.<도서출판 고요아침>펴냄
* 성찬경/ 1956년 『문학예술』에 조지훈 추천으로 등단.
제1시집『화형둔주곡』
제2시집『벌레소리 頌』
제3시집『시간음』
제4시집『반투명』
제5시집『황홀한 초록빛』
제6시집『묵극』
제7시집『논 위를 달리는 그림자 버스』
제8시집『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제9시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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