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정신』2016-봄호 / 우리 시대의 시정신_48
전후 시의 언술 특성:
애도의 언어와 우울증의 언어*(발췌) _ 김승희
목마와 숙녀 / 박인환(1926~195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뷔지니아 ·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내가 잠시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뷔지니아 ·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있어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전문--
위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와 '뷔지니아 울프라는 큰 타자의 상실과 그 슬픔, 그리고 그 상실을 부인하고 '떠난 자'의 현존을 되불러오는 반복 강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매개로 했을 때만 '큰 타자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목마를 타고 떠나간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적 자아는 대상 상실에 대한 불관용과 끈질긴 무의식의 고집에 의해 대상을 전환한다. '뷔지니아 울프'는 '목마를 타고 떠나간 숙녀-목마의 주인-잠시 내가 알던 소녀-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늙은 여류작가의 눈'으로 대체된다. 그러한 대상 대체는 라캉의 욕망과 애도의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14행에서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에서처럼 쇼즈의 상실을 수납하고 단절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그러나 결코 모성적 큰 사물인 쇼즈의 상실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지 못한다. 대상과의 단절은 곧 자아의 점멸이자 황폐한 자기파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성적 큰 사물인 쇼즈는 어린 소녀, 청춘을 찾은 뱀이 마시는 두 개의 바위틈과 같은 에로틱한 대상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애도는 삶 충동과 반복 강박이고 욕망이고,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이자 죽음 충동이라고 했을 때 박인환의 전후 대표시「목마와 숙녀」가 보여주는 것은 애도의 욕망과 우울증적 언어의 나르시시즘, 죽음 충동의 혼재다.
이 텍스트는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인 단절의 심리와 "우리는 이야기한다-기억해야 한다-바라보아야 한다-들어야 한다"라는 반(反)단절의 기억의 심리의 대립 사이에서 형성된다. 단절/반단절, 상실/그 부인(否認), 작별/재회의 대립 사이에서 시적 화자는 애도의 필연성과 포기할 수 없는 애욕의 동일시 사이에서 방황한다. 사랑하는 대상,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는 쇼즈 즉 큰 사물과의 단절과 분리에 대한 공포는 우울증적 불안을 낳고 그것은 술병에서 떨어지는 별-상심한 별-귓전에 쩔렁거리는 방울 소리-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바람소리 등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애도의 언어와 우울증의 언어라는 두 개의 이항 대립의 축 안에서 이 텍스트는 생성되고 있는데 "_하여야 한다/떨어진다, 부숴진다, 헤매인다"라는 서술형 동사의 대립적 성격도 애도/우울증의 혼재적 언술 특성을 환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 이 논문은 2008년 한국시학회가 발행하는 「한국시학연구」23호에 수록한 것을 재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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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태양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미완성을 위한 연가』『달걀 속의 생』『어떻게 밖으로 나갈까』『냄비는 둥둥』『희망이 외롭다』등.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당선. 소설집『산타페로 가는 사람』.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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