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2016-4월호, 이달의 문제작|시 부문(발췌)
기억과 감각을 통해 가닿는 시의 존재론
유성호(柳成浩)/ 문학평론가
1. 기억과 추모-고(故) 김하경 시인
한 계간지 봄호에서 '김하경 추모 특집을 마련했다. 김하경은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자랐으며, 생애 후반에는 경남 양산의 한 병원에 근무하면서 2012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지난해에는 첫 시집 『거미의 전술』(《고요아침》)을 펴냈는데, 나는 길지 않은 글을 그 책에 붙인 적이 있다. 지난 늦겨울, 서둘러 다른 세상으로 떠난 그녀를 추모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번 특집에 녹아들어 있다. 둘째 딸 김한영 씨와 시조 시단의 원로 이우걸 선생, 문단 동료인 이기영 시인의 추모 글이 실렸고, 박은형 시인과 성명남 시인의 추모 시편이 실렸다. "알고도 기꺼이 져주는 속 깊은 당신"(박은영, <더 좋은 당신께>)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어떤 한 시인은 도저히 실감을 가지고 추모 시를 쓸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언어로는 가닿기 어려운 추념과 위안의 시간을 이분들과 함께 나눈다. 추모 특집호에 유고로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 한 편을 읽어보자.
성인식/ 김하경(1964.11.1.~ 2016.1.19.)
남태평양 바누아르 펜더 원주민들 번지점프를 한다
발목을 미끼로 나이를 칡넝쿨로 묶어
하루하루 쌓인 시간 세상 바다로 뛰어내린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 위로 펼쳐진 담력
독수리 발톱처럼 감성돔을 낚아챈 손 번쩍 들어 올린다
바다는 허공에 물고기를 방생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세상에 방생을 한다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시간
촌각을 맞닥뜨린 낙하와 반동은 생사를 건 포물선
절대 고도에서 뛰어내린 성년식
모진 세상에 또 다른 자유를 주는 것
보자기에 싼 나이를 풀어놓은 아침
먼 길을 내려갔다 성인으로 되돌아 올라온 반달형 우클리족
불고기 한 마리 낯선 물속에서
길 없는 길을 열며 힘차게 헤엄을 친 포부 눈부시다
어머니가 나를 방생한 생일날
홀로 길을 열며 번지점프 중이다
-『열린시학』2016-봄호
성년이 되었음을 기념하여 치르는 의식인 '성인식'을, 저 남태평양 바누아르 펜더 섬 원주민들은 번지점프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모양이다. 사내아이들은 발목을 칡넝쿨로 묶은 채 훌쩍 '다른 세계'를 향해 뛰어내린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바다로 펼쳐지는 그 순간의 용기와 담력은 그들을 어느새 어엿한 '성인'으로 만들어준다. 그러한 독수리 발톱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모습은, 비로소 그들의 어머니가 아들을 세상에 방생하는 순간과 겹쳐진다. 김하경은 "절대 고도에서 뛰어내린 성년식"을 두고 "모진 세상에 또 다른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속성을 부여한다. 나는 첫 시집에 실려 있는 <생일>이라는 작품을 평하는 자리에서 "자기 기원을 알리는 정지된 지점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으로부터의 탈피(脫皮)를 가능케 하는 상징 제의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 '성인식'은 그 '생일'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고, 어쩌면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시간"을 알려주는 상징적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가 나를 방생한 생일날/홀로 길을 열며 번지점프 중"이라고 썼던 김하경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훌쩍 넘은"(<마산 어시장>) 채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기억"(<가현현상>)을 남기고 "모진 세상에 또 다른 자유를" 주기 위해 '다른 세계'로 떠났다.
헐겁게나마 살펴본 그녀의 마지막 시편들은, 일관되게 자유와 성숙을 갈망하고, 나아가 그리움과 영원과 긍정을 노래한 세계였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으로부터의 탈피(脫皮)를 가능케 하는 상징 제의"와도 같았던 그녀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마지막 빛으로 보여주는 실물이기도 하였다. 김하경의 시세계는, 그녀 자신의 따뜻한 성정처럼, 우리의 감각과 영혼을 충일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낭만적 꿈과 따뜻한 마음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그녀를 착하기 그지없었던 '자연인 김미숙'이자 자신의 생을 '시'로써 실천했던 '시인 김하경'으로 한동안, 아니 오래도록, 기억하게 할 것이다. "당신이 참 자랑스럽다고, 당신의 딸이라서 너무 행복하다고" 어머니께 인사를 건네는 김현영 씨의 말에 기대서, 비록 짧게나마 지면을 통해 그녀를 추모한다. ▩
* 유성호(柳成浩)/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평론집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침묵의 파문』『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등.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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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학사상』2016-4월호
<유성호_이달의 문제작|시 부문>에 수록된 시인과 시
김하경 _ 성인식
최문자 _ 그림자
황병승 _ 생각들
장석남 _ 바람과 대와 빛과 그릇
이재훈 _ 빛의 감정을 연습하고 싶었다
문태준 - 비양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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