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시집 속의 시 읽기/ 물결 표시 : 한정원

검지 정숙자 2015. 7. 22. 23:44

 

 

 

    물결 표시 _  한정원 

 

  

   짧은 물결 표시 〜 안에서

   그가 긴 잠을 자고 있다

   휘자(諱字) 옆에 새겨진 단단한 숫자

   ‘1933년 3월 18일~2010년 4월 22일’

   웃고 명령하고 밥을 먹던 거대한 육체가

   물결 표시 위에서 잠깐 출렁거린다

   햇빛이고 그늘이고 모래 산이던,

   흥남부두에서 눈발이었던,

   국제시장에서 바다였던

   그가 잠시 이곳을 다녀갔다고

   뚜렷한 행간을 맞춰놓았다

   언제부터 〜 언제까지 푸르름이었다고

   응축된 시간의 갈매기 날개가 꿈틀

   비석 위에서 파도를 타고 있다

   효모처럼 발효되는 물결 표시 안의 소년

 

 

    한정원『마마 아프리카』

  한 사람의 가장 믿을만한 인자를 집약한 책은, 곧 인격이다. 책이야말로 사람이 만들고 사람에게 베풀며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항구불변의 혈액이기에 저자는 저자대로 독자는 독자대로 책의 갈피갈피에서 심적 정신적 수혈을 받는가 하면 미증유의 것을 발견/발전시키며 위안점을 찾기도 한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오늘날의 책은, 그러므로 종이를 베풀어준 숲의 자식이요, 글자를 만들어낸 선조의 지혜이며, 인쇄술을 꽃피운 문명과 전 인류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다종다양, 연신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물결 속에서 최근 한정원의 시집 『마마 아프리카』를 읽었다. “세상의 엄마들은 다 눈물이라고”(「아메바 뮤직」) 화자는 피력했다. 자식으로서의 ‘어머니’와 부모로서의 ‘엄마’ 양쪽을 모두 살아본 이만이 이런 결과론적 진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메바 뮤직」은 이 한 구절에서 독자의 감동을 선취할 뿐 아니라 표제작 「마마 아프리카」까지를 이어주는 틀을 다져놓았다. 아무리 보편적 개념일지라도 적재적소에 진정성과 함께 배치될 때 그 파장과 효과는 배가된다.

  남다른 눈으로 보아내는 것, 보아낸 그것을 외수없는 작품으로 빚어내는 일은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형광인가. 어느 누구의 저서를 펼치든 우리는 맨 먼저 지은이의 생몰연대와 국적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대적 배경, 그가 이룬 학문, 그의 개인적 삶을 섭취하고 기억하며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맺어나간다. 여기서, 한정원의 이번 시집에 수록된 「물결 표시」를 되짚지 않을 수 없다. 누구라도 간과하기 십상인 물결표(~) 하나, 닿소리나 홀소리도 아닌, 어떤 형태소도 아닌 그 하나의 부호를 이토록 의미화한 예는 참으로 드물기만 하다. 테마가 거창하지 않아도, 플롯이 복잡하지 않아도, 대상이 더없이 작은 것일지라도 최초의 발견자는 발명가에 맞먹는다.

  “시에 있어서 말이란 그 직접적인 주제를 형성하는 리얼리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리얼리티, 전 우주, 또는—더 정확히는—저자나 인식자의 전 존재론적 경험을 <의미>한다.”(『무카로브스키의 詩學』p.12)는 내용에 비추더라도 ‘물결표’를 보아낸 「물결 표시」는 화자의 감식안과 시적 경험, 그리고 남다른 인식력을 엿보게 한다.

  이 지면에서 표제 시「마마 아프리카」나 그 외의 다른 가편들을 제쳐두고 굳이「물결 표시 」를 다시 읽는 까닭은 (이미 시집에 수록된 해설자의 독해를 뛰어넘을 수도 없을 뿐더러) 소재의 참신성과 경제적으로 운용된 감정과 언어, 그리고 휘자에 대한 객관적 거리까지를 유지한 완성도에 있다. (정숙자) ▩

 

   * 『시사사』2015.7-8월호/ 시집 속의 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