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화두/ 맹난자

검지 정숙자 2015. 9. 30. 02:46

 

 

    화두

 

    맹난자

 

 

  경봉선사께 받은 화두(話頭)는 '시삼마(是甚魔)'였다.

  50년 전, 통도사 극락암에서 "예까지 몸뚱이를 끌고 온 이 마음은 무엇인고?"를 물으시며 "이 무엇고?"의 화두를 내려주셨다.

  근본 취지도 모르면서 어느 날 나는 애꿎게 1700개 공안(公案) 중에서 화두 하나를 골라 들었다. 『벽암록』제 45칙의 '만법귀일'의 공안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데 그 하나로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나는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베옷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조주스님과의 문답에서 나는 세 가지가 궁금했다.

  첫째, 만법은 왜 하나로 돌아가는가?

  둘째, 돌아가는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셋째, 조주는 왜 뚱딴지같이 베옷 한 벌의 무게가 일곱 근이라고 했을까?

  머리를 굴려 답을 찾지 말고 온몸이 의단(疑團)과 한 덩어리가 되어 천지 허공이 갈라지는 경계를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소 안목이 열린다고 충고한 선지식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자리에 앉곤 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만공선사도 이 화두로 깨쳤다.

  어느 날 ,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空)이 없어지고 눈앞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법계를 관찰할진대 모두가 마음의 지음이라)'를 외우던 중이었다. 그때 두우둥 둥 새벽종 소리가 울려왔다. 한순간에 미망의 경계가 벗겨지고 어두웠던 눈앞이 환하게 열리더라고 했다.

  만법(萬法)이 만 가지로 벌어짐은 온갖 존재의 차별을 뜻한다. '하나'로 돌아간 '귀일(歸一)'의 자리는 자취를 감춘 평등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는지.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차별적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만법귀일'의 만(萬)과 일(一), '베옷 한 벌과 일곱 근'의 7과 1은 각기 평등과 차별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모든 차별이 실체(實體) 없는 공성(空性)임을 안다면 일체의 차별이 근원적인 한 가지 이치로 회통된다는 의취로 풀이해 본다. 이 공안에 송고(訟古)를 붙인 설두스님은 "일곱 근 장삼 무게를 몇이나 알까? 이제 서쪽 호수에 던져 버렸으니 산승은 장삼이 필요치 않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다시 말해도 '서 푼어치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조주)의 계책에 걸려들었다'고 한 것은 분별에 속지 말라는 뜻이리라.

 

  어영부영 칠십 줄에 들어서니 '일귀하처'의 화두가 더욱 절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사후(死後)가 궁금했다. 1871년 영국의 캘빈 경은 "어쩌면 생명의 씨앗이 운석으로부터 지구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멜버른 북쪽 머치슨이라는 마을에 운석이 폭발해서 작은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 운석은 43억 년이나 되었고, 거기에 74종의 아미노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고생물학자인 닐 슈빈은 우리 존재의 시원을 137억 년 전, 빅뱅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우주의 모든 은하들, 지구의 모든 생명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와 몸은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137억 년 전, 특이한 한 점(點)에서 시작된다'고 언급한다. 우리 몸은 물질로만 본다면 원소들을 골라 뒤섞은 혼합물이다. 주로 가벼운 수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그네슘, 철, 코발트 같은 무거운 원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은 수소, 헬륨, 리튬의 원소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머지 원소들은 빅뱅 이후 만들어진 별이 최후를 맞는 초신성 폭발 과정에서 생성됐다. 그러니까 우리는 별이 내려준 원소를 먹고 존재하는 것이다. 초신성이 폭발하면 그때 발생한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 물질에 전해진다. 그러면 성간운(星間雲)의 밀도가 증가한다. 그 결과 새로운 별의 탄생으로 이어질 중력 수축이 성간운에 유발된다. 성간운에 들어 있던 수소와 헬륨이 뭉쳐서 별이 만들어진다. 거의 모든 별의 내부에서는 수소에서 헬륨이, 헬륨에서 탄소와 산소가 만들어진다. 네온, 마그네슘, 황 등의 순서로 무거운 원소들이 합성되고 핵융합 반응의 최종 단계에서 드디어 철이 합성된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리들은 별의 자녀'라며 '별들의 기원과 진화와 그 뿌리에서부터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쓰고 있다. 아무튼 우리의 몸속에 있는 원자들은 모두 몸속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개의 별들이 우주 먼지를 제공해 주어 우리는 거기에서 왔으므로 인류는 빅뱅의 아득히 먼 후손이라는 것이다.

    빅뱅 정의 상황을 물리학에서는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대폭발이 '가짜진공 ' '스칼라 장(場)' 또는 '진공에너지'라고 부르는 어떤 것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모두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에서 불안정성이 나타나도록 해 주는 무엇을 뜻하는 말들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생겨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없음의 세계였던 곳에서 오늘날 우주가 생겨나는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무(無)의 불확실성 때문에 흔들려서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유(有)가 나왔다는 것이다. 

 

  "없음(無)은 천지의 처음을 일컫고, 있음(有)은 만물의 어머니를 일컫는다."(도덕경 제1장)은 노자의 일구가 우리를 일깨운다. 세상의 물건은 만물의 어머니인 유(有)에서 나왔으며, 이 유(有)는 천지의 비롯함인 무(無)에서 나왔으므로 결국 도의 근원인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본래 시작된 곳, 우주의 별로 돌아가는 것이니 역시 '순환'이다. 개체의 입장에서는 생사(生死)이지만 전체의 입장에서는 순환일 따름이다.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원시반종(原始反終), 『주역』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당에 나와 찬란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며 쾌활하게 떠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할머니도 거기에 계실까. 쇼펜하우어의 음성도 들린다.

  "인간의 죽음은 대자연의 사이클일 뿐이다."

 

 

   *『월간문학』2015-10월호 <수필>에서

   *  맹난자/ 1996년『수필공원』으로 등단. 저서『주역에게 길을 묻다』『나, 이대로 좋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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