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호박꽃/ 김원옥

검지 정숙자 2015. 5. 8. 00:10

 

 

     호박꽃

 

     김원옥

 

 

  며칠 전 개인적인 일로 지방에 갔다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호박농사 짓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내 방식과 확연히 다른 방법이었지만 호박꽃을 보는 순간 거의 잊었던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1970년대에 나는 대전에서 살았다. 셋방살이로 두세 번 이사하다 용문동에 와서야 내 집을 마련하였다. 10여 년 사는 동안 대전이 우리나라의 중간쯤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서울에서 경상도나 전라도 쪽으로 오가는 문인들은 으레 우리 집에 들러 먹고 마시고 자고 가 무던히도  손님을 많이 치렀던 시절이기도 했다.

  용문동 시절 마당 한쪽에 화단 옆 보도블럭 두어 개를 들어내고 깊이 판 다음 변소 푸는 아저씨에게 부탁하여 거기다 인분 한 바가지를 붓고 묻었다. 겨울을 나고 그 위에 호박씨 몇 개를 심었다. 호박넝쿨은 시멘트 벽돌 담장을 타고 잘도 자랐다. 호박꽃이 무수히 피었고, 아침마다 나는 수꽃을 따서 암꽃에 수분을 해주었다. 벌 나비가 오죽 잘 알아서 하련만 그래도 나도 한 축 거들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암꽃에서는 거의 모두 호박이 맺었다. 두 줄기 올린 넝쿨에서 어찌나 많은 호박이 달리던지 동네 사람이 모두 따먹어도 남을 정도였고, 가을에 늙은 호박도 몇십 개 거두었다. 감히 농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수년을 이렇게 호박에 심취하였다. 지금도 호박꽃을 보면 반갑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미소를 지으며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한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호박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깊은 애환을 지닌 서정의 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돌담이나 울타리 혹은 자투리 땅, 밭두렁 어디에서나 피고 지는 꽃이기에 어머니의 향기를 느낀다. 가난하던 시절에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던 꽃. 이렇게 흔하고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도 잘 피는 호박꽃을 보면 언제나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 선생이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그분은 생각마다, 보는 것마다 눈물을 흘리셨다. 그분은 오류동에 사셨고 우리는 용문동이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래서 주말이면 제일 먼저 우리 집에 오셨다. 현관 마루 끝에 걸터앉으면서 "이 선생 있나?" 물었지만 몇 개월 지나면서는 그것조차 묻지 않으셨다. 그 당시 그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이 되면 휴가를 보내게 된다. 간호사로 직장에 다니는 부인을 대신해서 가사일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 노는 거 아냐. 나도 일 많이 한다구. 아이들도 기르고 밥도 하고, 우리 막내아들 내가 길렀잖아. 나도 주말이면 술도 먹고 쉬어야 해."

  우리 집에 오시면 항상 첫마디가 그랬다. 그러곤 또 울었다. 아마 일주일 동안 참았었는지도  모른다. 그분이 울기 시작하면 잠시 후에는 눈물이야 콧물이야 얼굴은 온통 무슨 물로 범벅되어 버린다. 그래서 난 항상 주말이면 수건을 준비하곤 했었다.

  여러 해 동안 이런 일은 반복되었고, 호박꽃을 보면 더 슬프게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우셨다.

  "왜 너는 호박을 기르니? 왜 니 호박을 저리도  이쁘니? 홍래 누님 보는 것 같아."

  "호박 좀 따 드릴까요?" 물으면 "아니, 난 그저 보면 돼. 우리 홍래 누님 보듯이……." 하면서 내가 호박 좀 드리겠다는 말에 또 운다.

  그분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몹시 당황했었지만 그것도 여러 해가 지나면서 터득한 것은, 울고 싶을 때까지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이었다. 막걸리라도 한 잔 받아 드리면, 물론 막걸리를 드시면서 또 우신다. 왜 우느냐고 물으면 홍래 누님을 부르며 또 우신다. 고향엘 자주 다닌 이유인지 아무튼 그 시절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소설가 이문구 씨는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분의 우는 사연을 정리해 주었다.  

  선생은 막내로 태어나다 보니 어머니가 늦은 나이였고, 부모가 늘 바쁘다 보니 여남은 살 손위누님 손에서 자랐다. 똑똑하고 재주도 많아 공부도 그림도 뛰어나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강경상고에 입학도 했고, 졸업 무렵 그를 키운 누나가 강 건너 마을로 시집을 갔다는 것이다.

  엄마 같은 누나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는데, 그 누나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 그에게 왔고 그때부터 눈물보가 터져 지금까지 운다는 것이다. 은행에 취직해도, 교사가 되어도 눈물 때문에 오래 지속할 수가 없어 이제는 가사일을 하며 시나 쓴다고. 박용래 시인은 평생을 그리워한 누님의 시집가는 모습을, 내가 수없이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누님은 만혼이었다.

     스물여덟이던가, 아홉.

     선창가 비 뿌리던 날

     강 건너 마을로 시집을 갔다.

     목선을 타고

     목선에 오동나무 의걸일 싣고

     그 무렵 유행하던 하이힐 신고

     눈썹만 그리고 갔다.

 

  박용래 선생의 기억 속에 홍래 누님의 마지막 모습일 수 있는 이 장면은 그가 198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그분 떠나시고 주말이 되면 나도 눈물을 흘렸다. 아주 오랫동안. 다소 바보처럼 악의 없이 벙글벙글 웃고 있는 호박꽃, 벌 나비들이 뭉텅뭉텅 드나들어도 상관 없을 것같이 크고 너그러운 호박꽃. 내게 호박꽃은 눈물 그렁이며 추억 속에서 헤매는 박용래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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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세이『먼 데서 오는 여인』에서/ 2015. 2. 28. <도서출판 황금알> 펴냄

  * 김원옥/ 서울 출생, 2009년『정신과 표현』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