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잘 정렬된 목뼈/ 고은산

검지 정숙자 2015. 5. 30. 17:14

 

 

    잘 정렬된 목뼈

 

     고은산

 

 

  매혹의 물결을 잃어버린 립스틱 색깔의

  한 生, 한숨을 길가 작은 수퍼마켓의 평상이

  수 년 동안 삐거덕거리며 들어왔다

 

  눈앞으로 펼쳐진 산맥으로 굽이치는

  단조 가락풍 기억의 세포들

 

  세포 사이마다엔 흔들리는 낡은 노끈 같은 회상이

  빽빽이 들어있다

 

  그 노끈을 당기는 중년의 시골 여성 손가락 마디가

  오늘따라 더욱 시큰거린다

 

  뇌졸증 후유증으로 가파른 바위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편, 돌쩌귀에 걸린 찢어진 연서처럼

  그녀의 맥박을 흔든다

 

  마비된 병원비에 휘청이는 가계부는

  서글픈 잉크 자국이 선명하다

 

  잉크 자국들 저녁녘을 뚫으며

  대뇌 속을 파리하게 긋는다

 

  잔깐 사이, 멀리서 반듯한 하이힐 소리가

  어스름을 밟으며 온다

 

  막 도착한, 하이힐을 신은 둘째 딸의 입술 사이,

  단풍나무 향이 흐른다

 

  성실한 손목의 비누 거품 같은 힘이 미치는

  딸의 손길은 지금, 어스름에 잔잔히 겹쳐진다

 

  그녀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딸의

  치열은 민트 빛으로 포획한 음식을 씹는다

 

  가계 장부 위로 푸르른 잉크 자국이

  선혈처럼 찍히며,

 

  돈이 없어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의 재활 치료도 가능하다

 

  이제, 삐거덕거리던 평상 위로 잘 정렬된 목뼈 같은

  언어들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 들릴 것이다

 

 

  *『애지』2015-여름호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조명한다>에서

  * 고은산/ 전북 고창 출생, 2010년『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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