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김남호 평론집_『불통으로 소통하기』에서/ 아포리즘으로 읽는 이형기

검지 정숙자 2014. 5. 25. 00:41

 

 

    아포리즘으로 읽는 이형기

 

     김남호

 

 

  사전에서는 '아포리즘'(aphorism)을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네이버 두산백과)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잠언'이라고 옮기는 이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집(aphorisms』이 최초의 용례라고 되어 있다. 이 책의 첫 문장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가 아포리즘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이 첫 문장은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를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사는 게 혼란스럽고, 헷갈릴 때 우리는 누군가가 혼란을 정리해주길 바라게 되고, 그 해결사의 역할을 종교의 교리나 경전, 혹은 당대의 식자(識者)나 견자(見者)들에게 맡긴다. 그러면 그들은 나름의 지혜를 모아서 우리 눈앞의 안개를 거두어 준다. 쉽게 말하면 그 '안개제거제'가 바로 아포리즘이다. 깊은 사유와 통찰에서 건져 올린 촌철살인의 경구들은 정확히 우리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찔러 잠들었던 의식을 화들짝 깨어나게 해주고, 눈앞을 환하게 열어준다.

  우리는 그런 아포리즘의 대가들을 몇몇 알고 있다. 아포리즘을 철학적 사유의 방편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니체가 그들 중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이형기 시인이 사숙(私淑)해 마지않았던 절망과 허무의 대가 에밀 시오랑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아포리스트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포리즘을 명상과 사유의 도구로 삼았던 이들이 많다. 비교적 잘 알려진 시인들 중에서 찾는다면 이성복 시인을 들 수 있겠다. 그의 아포리즘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첫 페이지를 펼치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아마추어인 우리들은 시를 갈구하지만, 시로서는 엄격하게 우리들의 간(肝)을 요구한다. 사춘기의 소년들이 시으의 독가스를 쐬고 유태인들처럼 죽어간다." 옆구리에 시퍼런 비수를 들이댄 듯 섬뜩하다.

  이처럼 비정하면서도 명쾌하게 우리의 머릿속을 정리해주는 아포리즘의 대가를 꼽자면 이형기 시인이 단연 엄지손가락을 차지하리라. 폭넓은 독서와 치열한 사유, 냉철한 통찰과 구조적 사고에서 빚어낸 그의 아포리즘은 그의 시 못지않게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촌철의 비수로 이 세계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폭로하고 고발했다. 그래서 그의 아포리즘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는 그의 아포리즘 중에서 몇 편만 골라 그것에 기대어 그의 삶과 문학의 한 측면을 엿보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 인용한 아포리즘은 그의 아포리즘 선집 『존재하지 않는 나무』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시인은 영구혁명주의자다. 영구혁명주의자는 물론 제가 이룩한 혁명을 뒤엎고 또 새로운 혁명을 꿈꾼다. 그렇게 제 자신을 끊임없이 뒤엎기 위한 그 혁명의 다른 이름은 허무를 향한 열정이다. 시나 영구혁명이나, 이 모두가 한통속이구나."- 『영구혁명주의자』

                                                               

  "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는 시인이다."- 『티끌의 노래』

 

  "시인은 은성을 극하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오히려 폐허를 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폐허에 섰을 땐 무엇을 보는가. 그때도 역시 폐허 그것을 시인은 본다. 시인의 눈은 그 자체가 폐허인 것이다." -「폐허」

 

  "누구나 절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망은 절망할 줄 아는 재능과 그 재능의 불꽃 같은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정열이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하나의 특수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절망을 사람들은 흔히 재능도 정열도 없는 자의 심약한 자포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절망할 줄 아는 재능』 

 

  앞에서 인용한 몇 개의 아포리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형기 시인의 세계관은 확고하다. 한 줄로 압축한다면 그는 '도로(徒勞)와 허무(虛無)와 폐허(廢墟)와 절망(絶望)의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도로'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수포로 끝맺는 '헛수고'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끝없는 자기갱신의 방식이고 영구혁명의 과정이다. 이는 비단 이형기 시인만의 사유라기보다는 '눈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려는 (擔雪塼井)' 선가(禪家)의 지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예찬하는 폐허, 역시 그렇다. 모든 건조물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딜 수 없다. 시간을 신(神)의 다른 얼굴이라고 할 때, 건조물의 맨 마지막 모습이 완성된 모습이라고 본다면 폐허야말로 그 궁극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네온사인이 명멸하고 빌딩이 숲을 이룬 대도시 한복판에서 폐허를 보는 것은, 세인들에겐 황당한 공상으로 비치겠지만 시인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혜안이라고 보는 거다. 하여 절망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암흑의 상태가 아니라, 열정이 빚은 '빛나는 실패'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재능으로서의 '절망(絶望)'이란 '절망(切望)'이 아니겠는가. 절망이 전제하기 위한 대전제는 바로 희망(希望)일 테니까. 이런 '도로'와 '폐허'와 '절망'으로 빚어낸 것이 그의 허무주의이다. 이때 허무는 우울증을 수반하는 결핍과 부재라기보다는 보아버린 자의 담담한 달관(達觀)에 가깝다. 

 

                                                           *

 

  "파멸은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아름답다. 그 비극성이 그만큼 고조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비극이라는 것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통속극일 뿐이다." - 「파멸은 아름답다」

 

  "인간에게는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불행할 수 있는 권리도 있다. 이 두 가지 권리의 전자는 보편성을 갖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권리를 몰각할 경우 인간은 행복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존심이 있는 주체적 존재인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창조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행할 수 있는 권리는 창조자의 대표인 시인의 특성이다." -「불행할 수 있는 권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예수는 생각할 수 없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은 배신자 유다다. 그러니까 숙명적으로 동행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사람들은 따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두 사람이 따로가 아니라 한 몸이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와 갈등을 동시에 체현한 모순으로 존재한다." -「예수와 유다」

 

  "밤은 잠자는 시간이다. 그러나 모두가 돼지처럼 잠들어버린다면 그것이 밤인 것을 누가 알 것인가. 잠들지 못하는 소수의 불면자 때문에 밤은 비로소 밤이 된다."- 「소수의 불면자」

 

 

  폐허를 찬양하는 시인이 파멸을 예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몰락은 아주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참혹 앞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맥주병은 간 데 없고 거품뿐이다. 신(神)이여 보소서, 이 허황한 붕괴를/ 붕괴해선 거품이 이는 인간사(人間事)의 우연을/ 당신의 뜻이지만/ 한 번 정한 후에는 당신도 어쩌지 못하는/ 이 당신의 뜻을 보소서 신이여."( 「자전거와 맥주가 있는 풍경」) 

  신도 어쩌지 못할 만큼 참담하게 무너져버린 인간사 앞에서 차라리 우리는 홀가분한 때가 있지 않던가. 절망을 하는 데도 재능과 열정이 필요하다면 몰락을 하는 데도 재능과 열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몰락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몰락이 따로 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다가 일순간에 죄다 놓쳐버린 '탐욕형' 몰락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추하다. 그러나 어떤 하나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서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한 '선택형' 몰락은 숭고하다. 시인의 아포리즘에 의하면 전자는 통속극일 테고 후자는 장엄한 비극일 테다. 그래서 '불행할 권리'는 '행복할 권리'에 맞먹는 권위를 담보하게 되고, 행복의 노예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기꺼이 절망의 편에 서서 '희망고문'을 정중하게 사양하는 것이다.

  이건 시인의 특성이기 이전에 인간의 품격이기도 하다. 이미 중학교(진주농림학교) 시절에 폐병으로 타계하신 선친을 대신하여 가족 생계의 일부분을 떠맡아야 했던 소년가장 이형기 시인에게 '인간의 품격'은 얼마나 지키기 힘든 화두였겠는가. 절망과 허무를 견디며 생활인으로 거듭나야 했던 그에게 '시인'이란 자의식은 무너질 수 있는 명분과 무너져서는 안 되는 명분을 동시에 제공했을 것이다. 시인이란 예수와 유다를 한 몸에 지닌 모순된 존재이므로. 그런 그에게 숙면보다 불면의 밤이 더 많았을 테고, 종종 뜬눈으로 수많은 밤들을 증거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신(精神)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육체나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 그러나 가끔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를 은유하기도 한다. 잠들지 못하는 자에게 고통스런 밤이 있듯이, 깨어 있는 자에게는 백열한 정신이 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세계의 맨 얼굴을 응시하고자 했던 이형기 시인은, 정신줄 놓아버린 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정신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정신이다. 정신이 밥 먹여 주느냐는 자에게는 물론 정신이 있을 리 없다." -「정신」▩ (p. 320~325.) //  (이형기문학제 자료집. 2013년)

 

                                                                                                                                                                                                                                                                                                                                                                                                                                                                                                                                             .

   ----------------------

  * 김남호 평론집『불통으로 소통하기』에서/ 2014.4.20. <북인>펴냄

  * 김남호/ 1961년 경남 하동 출생, 2002년『현대시문학』여름호- 평론 등단,  2005년 『시작』겨울호 - 시 등단

  * 시집/ 『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