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헛묘/ 최은묵

검지 정숙자 2014. 3. 13. 01:33

 

 

     헛묘

 

    최은묵

 

 

  영문도 모른 채 떠났던 집

 

  문패뿐인 빈 집에는 종일 굶은 바람이 앉아 있었다

  부엌은 닫혔고 방문 틈에선 흙냄새들이 기어다녔다

  오후에 사람 몇 찾아와 문패를 닦고 갔다

  각진 몸으로 우직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문패

  볕을 수확하지 못한 빈집 지붕은

  초저녁부터 산 그림자가 차지해 버렸다

  낯선 사람에게 목이 묶여 끌려간 강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담 곁 풀잎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환청처럼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전 나는 아침에 뜨던 달처럼 지워졌다

  옛집의 문패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다리던 가족들, 하늘 훤한 땅에 집 한 채 새로 지었으니

  등 굽은 땅에 내가 없더라도

  내 아이들 함께 모여 맘껏 서러워할 수 있겠다

 

  속 빈 땅을 지키는 돌비석이 헛묘를 쓰다듬는 밤

  지워진 사람을 찾으러 별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로여는세상』 2014-봄호

  * 최은묵/ 200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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