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밤은 판화처럼/ 이혜미

검지 정숙자 2014. 3. 1. 15:36

 

 

     밤은 판화처럼

 

      이혜미

 

 

  목련이 지기 전에 도달해야 하는 왕국이 있어, 젖은 발을 끌며 강가

로 이어지는 돌길을 걸었다 무수히  흘러내리는 실선들을 따라 하루

의 반대 방향으로 모든 것이 흘렀다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에 대한 내 서신은 그대의 유한함을 일깨웠

을까? 밤새 수북이 쌓인 우주의 뼛가루들을 하늘에 온통 부려놓는 이

가 있어, 가라앉은 재와 유골이 문득 피어오르며 두렵고 복잡한 무늬

를 이루는지?

 

  여러 겹의 푸른 돌이 한 장의 확실한 세계를 이룰 때, 얼룩진 발을 더

듬어 찾으며 사라지려는 것들을 떠올린다 검은 가지 위에 걸린 창백

한 목련의 얼굴, 손가락 끝에 매달린 사람의 손, 옛것을 당겨 품에 안

던 하룻밤의 지붕, 희고  검은 가루들이 난무하던

 

  혹여 흘러가고 없는 빛이 이제야 그대 벗은 등을 비추는지? 그림자

를 수의처럼 걸치고 검게 물든 목련을 만지면, 날카로운 손톱 끝에 환

한 조각도가 떠올랐지 서로의 음영을 가만히 겹쳐보던, 밤의 그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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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2014-봄호/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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