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상형문자 풀이/ 오승근

검지 정숙자 2010. 11. 26. 00:52

  

   상형문자 풀이


     오승근



  용무늬의 음각이 꿈틀거리고 있는 도장 하나

  계단 위에서 떼구르르 굴러 떨어졌단다

  천도재를 지내는 목탁소리였던가

  하늘과 땅의 경계를 막 그어 놓은 두 줄의 빨간 선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단다

  두 줄 사이에서 혼령은,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혈흔 같은 인주가 세상에 찍혔지만

  정작, 부족한 혈액 보충하지는 못했단다

  인감도장에 상형문자를 새기며

  서류뭉치에 처음 인감을 담보하던 날

  파란 하늘에 두어 평쯤 되는 번지수를 새겼단다

  살아오는 동안, 번개 몇 번 맞았고

  마른하늘의 날벼락 맞으며

  대추나무도 도장처럼 단단해져 갔단다

  순탄한 삶이 보증되리라 믿으며

  세상에 이름 석 자 주렁주렁 영글어 갔단다


  더 이상 인주가 묻어나지 않는 인감도장

  이제 막, 그 난해한 상형문자를 다 풀이했단다

  마지막 직인이 사망신고서에 찍히자

  번지수가 새겨진 두어 평의 하늘을 향해

  비로소, 두 줄 사이를 벗어나 승천하기 시작했단다



  *시집『세한도』에서/ 2010.10.25<도서출판 지혜>펴냄

  *오승근/ 충남 공주 출생, 2009년『유심』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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