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살아남기보다 살아있기/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0. 12. 15:31

 

 

   『시와정신』 2013-가을호 / 우리 시대의 시정신_38

 

 

     살아남기보다 살아있기

 

     정숙자       

                                                                                ‘우리시대의 시정신’이라는 범위가 아무

                                                                                                    래도 내겐 너무나 넓다. ‘우리시대의 나

                                                                                                      의시정신 정도라면 무방하지 않을까?

 

 

   지층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그는 필시 광인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태어났다는 데서 모든 일은 시작된다. 하나하나 전개되는 게 아니고 운명, 숙명, 삶, 사랑, 죽음, 별의별 현실과 현상, 현장과 내세에 관한 물음까지도 한꺼번에 총망라된다. “알렙”(『알렙』보르헤스)도 그런 류의 은유였을까? 그 알렙이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숨겨진-압축된 오컬트였을까? 4차원의 눈을 가진 이가 응시한다면 당신의 일생이든 나의 하늘이든 전체를 동시에 보아낼 수 있지 않을까?

   동양적 사유에서는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라고 빗대거니와 그 한 방울의 이슬, 한 방울의 사람이야말로 ‘알렙’일 수 있다는 비약이 전혀 엉터리방터리는 아닐 듯싶다. 내가 ‘나’라는 ‘알렙’을 투시하지 못하고 다만 그 ‘알렙’을 살아갈 따름이라는 도해가 얼핏 밝아지니 말이다. 그 촘촘한 인드라망을 한 코 두 코 섭렵하자면 무언가 하나쯤 붙들어야 거기 기대거나 몸을 싣고 수평선 저쪽까지 노 저어갈 수 있을 터인즉, (당신은)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 초점에 대하여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시’라고 답할 것이다.

   시는 어떤 물리적 범주의 파워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들은 그 종이배에 올라 까딱까딱 뒤집어지기는커녕 마(魔)의 삼각지대일지라도 펜 한 자루로 용케 뚫고 나아간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무슨 수로 전에 없던 한마디를 구슬릴 것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층 가운데 나의 층위는 무엇이며, 지형/지번을 어떻게 개선/구축하여 개성적 영토를 획득/확장할 것인가. 상상과 실재는 버무리기 꾀까다로운 근간이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매혹이었을 뿐 아니라 잇따르는 전전반측마저 보람으로 환원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방금 피력한 전전반측의 연장선상에서 간혹 삶의 이전과 이후를 동경하기도 한다. 시유도원(詩遊桃園)에서 깨어나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힐 때면 ‘태어남’ 자체를 물리고 싶은 찰나가 스며들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이 백 년 동안만 섹스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삶’을 백지화할 수 있을 텐데> 혼자 중얼거린 적도 있다. 신은 우주 콘셉트에 무량수의 생명을 저장해 놨다. 그리고 대개의 수컷들은 엉뚱한 데 돋아난 뿔로 호시탐탐 클릭! 클릭! 클릭! 주파수가 맞아 떨어지면 탄생, 탄생, 탄생의 증폭.

   게다가 인간의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진다는데, 헉헉-뻐르적대는 우리의 논픽션이 신들에게는 항용 펼쳐지는 픽션일 것이다. 백인백색 미묘하고 눈물겨운 이 생존이 말이다. 시가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써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파도치는 대지를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껏 ‘시’라는 꿈에서 이탈해 본적 없는 나는 다만 오체투지, 시신(詩神)을 경배하며 믿으며 역시 신만이 아는 대단원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자 할 뿐이다. 시인의 세계란 색즉시공(色卽詩空)이요, 공즉시색(空卽詩色)이므로 오롯이 시에 살고 시에 묻히면 그뿐.

 

 

    명멸

   ‘명멸’은 집단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용한다. 그 집단의 안쪽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가 있고 우리가 있다. 그러나 너는, 나는, 그는, 우리는 명멸이라는 기표로 쓰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체는 ‘명’이거나 ‘멸’이거나 둘 중 한쪽에만 속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명멸’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수렴한다. 또한 한 생명의 출생이 ‘명’이고 죽음이 ‘멸’이라고 상정할 때, 그것은 출현에서 퇴장까지의 시공을 동시에 거느린다. 그러나 어느 집단에서 언표된 ‘명멸’이라면 시간이나 공간이 아닌 상황의 제시어로 가동되고 소비된다.

   바야흐로 현대는 풍요의 시대다. 물질, 지식, 정보 거기에 하나 더 얹어 인재에 이르기까지 넘친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풍요의 물결 위에서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이 과잉이 진정 낙원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걸까? 얼핏, 또는 곰곰 들여다봐도 흔쾌히 긍정할 수 없는 뭔가가 꿈틀거린다. ‘잘 살고 있다’가 아니라 ‘부대끼고 있음’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기에. 우리 시단의 작금만 하더라도 잡지의 홍수, 시인의 팽창, 작품의 범람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자연히 경쟁이 따라붙는다. 그것도 아주 치열한 경쟁력이.

   어느 구상성단에도 북극성은 있게 마련. 초신성과 혜성, 심지어 별똥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명멸하는 별들이 꼭짓점과 빛을 다툰다. 그러나 그것은 사심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욕심껏 거두어지는 것도 아니다. 북극성은 북극성대로 샛별은 샛별대로 자신의 두께와 키만큼 <성실>히 빛을 발하면 그만이리라. 두께와 키만큼! 주어진 자리에서! 살과 뼈를 바치는! 촛불과 다를 게 무엇이리오. 각자의 아름다움은 튐에 있는 게 아니라 <근면>에 있음이니 촛불의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절대로 누워서 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심신을 의탁하고 살아가는 지구, 세계라는 단위 아래 여러 조각으로 구획된 이 지구도 대단한 별이 아니라 행성일 따름이다. “은하수 은하의 가장자리, 나선 팔의 한쪽 끝, 은하 변두리 이름 없는 장소의 초라한 행성”(『코스모스』칼 세이건)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인류와 동식물과 산하를 충분히 먹이고 입히며 빛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보다 좋은 시를 써야 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가 너보다 튀어야 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자기 안의 적재량을 연소한다면 그게 바로 최선이 아니겠는가.

   시는 정신을 보여주는 도정이며 결과다. 그것도 타인에게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그는 최초의 독자이며 최후의 비평가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정확하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 발각되기보다 자신에게 먼저 들킨다. 스스로 <노력>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로부터 답보, 혹은 퇴보 일로에 처하게 된다. 뉘라서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정진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에 대한 예비로, 첫째-널리 읽기와 호흡하기. 둘째-깊이 읽기와 분석하기. 셋째-빨리 읽기와 융합하기 정도를 늘 염두에 둔다. ‘정신이야말로 육체다’ 끔벅이면서.  

 

 

    적응

   그리고 추가. 사회와의 관계는 더더욱 복잡하다. 탈고된 작품을 책상 서랍에 넣어둔 채 하직할 계획이 아니라면 어느 지면에든 발표해야 하고(하게 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고독감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발표는 반응과 무반응을 수반하기 때문에 용기와 각오도 다져둠이 타당하다. 작품을 발표한 당사자는 그 작품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최근에 내보낸 작품일수록 다각도로 의심하며 스스로의 질의응답도 결여할 수 없는 항목이다. 현대시의 구조는 가히 기하학에 닿아 있는 까닭이다.

   의도된 모호와 예인된 우연, 슬픔이 내장된 해학과 문학이 장치된 철학, 남발이 아닌 리토르넬로(ritornello)와 중력을 벗어난 클리나멘(clinamen) 등, 새로운 착상은 자아를 파내려간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자 황홀이다. 그러나 “황홀경의 감각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는 우리 인간의 특징인 ‘부적응을 통한 적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둔한 행복은 창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독은 일생의 임무다”(『고독의 위로』앤서니 스토). 이 좁은 길, 보이지 않는 길에 우리는 끝없이 적응해야만 한다. 극복이란 가당치 않다.

   “한 신뢰가 아름다울 때는 다른 한 신뢰가 받쳐줄 때이다. 한 신뢰가 아름다울 때는 다른 한 신뢰가 한 신뢰를 저버렸을지라도 그 신뢰를 탓하지 않을 때이다. 한 신뢰가 아름다울 때는 다른 한 신뢰가 그 신뢰를 저버렸으므로 한 신뢰도 깨끗이 돌아설 때이다. 한 신뢰가 아름다울 때는 다른 한 신뢰가 그 신뢰를 저버렸으므로 한 신뢰도 깨끗이 돌아서 ‘신뢰’라는 말조차 잊어버릴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뢰가 아름다울 때는 어딘가 꼭 무너지지 않을 신뢰가 있으리라 믿고 자기 안의 신뢰를 향해 다시 걸어갈 때이다.”

   이 메모는 내 다이어리의(2012.2.27-21:55) 일부다. 절망과 적응 사이-심적 갱생의 과정이었기에 여기 옮겨 보았다. 적응이란 단숨에 되지 않을뿐더러 그 유형에 따라 소요기간이 달라진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시세계에서 적응해야 할 파트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 자체의 암벽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인과관계에서 빚어지는 허무도 만만치 않다. 그 비탈에서 시를 빚어내는 행위란 깨진 계란으로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일과 맞먹는다. 그래도 그 뿌리가 소나무라면 결국 바위도 서리도 그믐달도 화응하고야 말 것이리라.

   고독은 단단하다. 어찌 착근이 용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처음 만난 어둠도 고독이었고 남은 추위도 고독일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독은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다. 침상에서 무덤까지 내 곁을 지켜줄 고독! 그가 건재하는 한 사유도 고갈되지 않을 것이며 발상의 덩굴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춘하추동 그와의 의리를 쌓고 그간의 우의도 소중히 간수하며 살아가리라. 하루는 길지 않다. 하루가 길지 않으니 한 달도 길지 않고, 한 해도 길지 않고 일생도 길지 않다. 고독은 정녕 내 정신의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중심

   바위 밑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웃음 짓는 꽃, 그가 바로 내가 읽은 최고의 ‘시’이며 정신이고 재현의 꿈이다. 길은 길 가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법. 견디기 힘든 고비도 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견디기 힘든 고비가 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견디기 힘든 고비만이 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한다. “한 번 선언된 사랑을 다시 선언하고, 또 선언하고, 충분하다고 생각 말고 선언하고, 지겨워 할 거라 염려 말고 선언”(『사랑 예찬』알랭 바디우)해야 한다고 외친 이가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왜일까? 그와 같은 반복의 권유는?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지속에의 당위가 들어 있었던 것. 도중에 포기한다면 사랑일 수 없고 예술일 수 없으며 정치/철학도 매한가지라고 천명한 아포리즘이었던 것이다.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나는 20여 년 동안 시단의 변두리에 서 있었고 다소의 명멸도 목도했다. 시인세계에서의 지층과 나 자신의 층위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더디게나마 겪고 습득하며 지금도 한 모서리 더듬는 중이다. ‘詩’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人’이 견지해야 할 척추를! 전위와 전통의 미덕과 속도를!

   나 자신에게 이르노니, <살아남음>의 욕망은 오만이며 그 오만은 다만 <살아있기>의 지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살아남음>은 내 몫의 일이 아니다. <살아있기>만으로도 혼신이 부족함.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고 기류가 바뀐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 흐름을 좇아서는 안 되며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감지해야 한다. 시인의 레이스는 시 외의 다른 것으로 슬퍼하거나 분노할 틈조차 없다. 옛 친구는 물론이요, 자식과 만나는 시간도 줄이고 줄여 몽상에 바친다. 영감 한 오라기는 그렇게도 먼 데서 내려오는 것이려니.

   연일 장맛비가 내리더니 오늘 드디어 매미가 울었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매미가 울지 않기에 ‘그래도 아직은 한여름이 아니야’ 은근히 기다리던 참이었다. 땅속까지 촉촉이 젖어들어야 매미도 몸이 풀리는가보다. 이제 곧 물결치는 매미 소리와 함께 태양이 뜨고 뭉게구름도 더욱 더 부풀 것이다. 여름 한 철 적막을 깨우는 그들의 출현을 누군들 반기지 않으리오. 더구나 이 지구는 그들의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 베란다 밖 한층 실해진 후박나무 사이로 까치 소리까지 끼어들었다. 저들도 그들이 반가워 까까까까 우짖는가?

   한 사회가 부패할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고 한다. 그 내용을 뒤집으면 시인이 썩은 사회는 아주 다 썩어버린 사회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썩음’의 의미는 사회만을 일컫는 게 아니고 ‘詩’와 ‘人’을 동시에 묶은 가상적 결과론일 것이다. 선비정신 청아한 우리의 윗대 어느 어른께서 남기신 일갈이었음직하다. 한번쯤, 간혹 돌아보자. 나는 썩지 않았는가. 썩어가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과 시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사회와 시대를, 내 자녀들을 위해서. 시 정신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중심과 내일모레의 현관을……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