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꽃병
김길나
하얀 꽃병 하나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병목이 긴 일본산 꽃병이었는데 얼핏 보아도 고상한 품격을 지닌 도자기 꽃병이었다. '얼핏'이란 말을 한 것은 그 꽃병을 제대로 관심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눈 밖에 놓여진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가끔 꽃병이 생기를 얻는 때는 꽃을 꽂고 있을 때였다. 꽃의 향기에 싸인 그 단아한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그때 뿐 꽃 피는 시절이 가고나면 다시 눈 밖으로 밀려나 있곤했다. 그러다가 꽃병이 아예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오랜 은둔 끝에 꽃병이 결국 행방불명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꽃병을 알아보고 내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때는 이미 꽃병은 아주 눈밖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실감한 사례다.
무릇 사물에는 시간이 남겨놓은 자국들이 머물러 있을 터, 이 꽃병이라고 왜 사연이 없었겠는가.
그날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비를 맞는 나무들이 조금 쓸쓸히 이파리들을 내려놓는 그런 오후였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젖는 이들이 있어 추억의 창에 귤빛 불이 켜지고 그 창 아래서 빗소리 따라 긴 얘기를 누군가에게 사분사분 풀어놓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와 마주 앉은 호젓한 방에서 나는 모처럼 할머니의 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사이의 회억(回憶)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우리의 아랫목 이야기 자리에 자주 아버지를 불러오곤 했다. 그날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담이 오갔고, 그러다가 할머니는 심중 깊이 숨겨 놓은 비밀을 꺼내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었다. 그 얘기 중심에 '꽃병'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전언 스토리는 대략 이러했다.
그때는 일본강점기였고, 아버지는 작은 할아버지의 거주지인 오사카에서 유학시절을 지냈다. 그 시절,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하숙방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엔 그 문제의 꽃병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 꽃병에는 색깔이 현란하지 않은 꽃이 수수하게 꽂혀 있었고, 꽃병 옆에는 양서 몇 권이 곁들여 있었다. 놀란 아버지가 급히 하숙주인에게 물었고 주인이 대답했다. 어느 여대생 같은 이가 다녀갔다고.
그 후로도 이런 일은 계속 되었다. 꽃이 시들 겨를이 없었다. 양서는 날로 쌓여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와도 그 선행의 주인공을 잡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의 수업일정표나 행동반경을 훤히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고조되어 갔다. 바로 이때, 드디어 편지 한 통이 꽃병과 양서 사이에 놓여 있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운명처럼 눈에 들어온 한 남자, 그러나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남자에게 수줍게 마음을 열어보인 그 편지는 그녀의 러브레터였던 것이다. 하숙방에서 발생한 이 일련의 상황전개로 청년은 호기심, 긴장, 놀람의 감정 단계를 거치면서 그 마술 같은 힘에 끌려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핑크빛 편지를 앞에 두고 청년의 가슴이 한동안 설랬을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다. 그녀의 '꽃병'이 지닌 단아함처럼 그녀는 그렇게 순수하고 단아해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지체 높은 일본의 귀족가문의 태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슬하에서 그늘진 소녀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대학진학을 빌미로 도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모가 살고 있는 오사카로 옮겨온 것인데, 이는 어머니의 핏줄인 이모와 함께 지내기를 원한 그녀 마음의 반영인 셈이다. 이렇게 하여 오사카대학에서 수학하게 된 두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게 된 것, 그러나 이 만남이 평탄하지 못할 것임을 청년은 직감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연애와 결혼의 분리가 용납되기 어려웠던 시절. 그러기에 그녀의 사람이 절절하게 다가올수록 청년은 어두운 예감으로 두려워했으리라. '결혼'이 청년에게는 넘기 어려운 벽으로 다가온 까닭에 더욱 상심했으리라.
지배국가의 귀족 아가씨와 피지배국의 힘없는 청년, 이 불균형 관계도 문제지만, 1930년대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국제결혼'은 수용이 어려웠던 난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데 대한 모친의 반대가 불을 보듯 자명하게 예상된 바, 이 장애의 요소들이 국복불가의 벽으로만 느껴졌을 터이다. 아마 청년은 많이 고뇌했을 것이다. 고뇌의 결과로 얻어낸 결심을 그녀에게 전하기로 작심한 후로도 이를 결행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끝내 작심한 바를 그녀에게 말하고 말았다. 우리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 결혼은 불가하다고, 그러니 남매처럼 지내자고……
전언은 결연했고 경청의 표정은 비감했다. 비감한 중에도 그녀는 자기의지와 소망을 간곡히 드러냈다 한다. "조선으로 가서 조선말 배우고 조선옷 입고 조선음식 만들어 어머님을 극진히 봉양하겠습니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현실의 먹구름은 풍파를 몰아왔고, 이 연인들의 조각배는 난파위기로 말려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청년은 수업 중에 호출되어 영문도 모르고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곳은 어느 대저택의 가든파티 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행사 주빈 석에 놀랍게도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있었고 안내자는 청년을 그녀 곁에 세웠다. 그녀 아버지로 직감되는 어른이 정중하게 청년을 맞이했다. 청년은 우선 그녀 아버지의 위엄에 압도당하고 정원에 모인 사람들과 그 향연 풍경에 위축되었다. 촌닭 성중에 잡아다놓은 것처럼 어리둥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향연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 대해 알아야 했으므로 청년은 그녀에게 물었다. 이 파티에 왜 나를 초대했느냐고? 그러나 청년은 초대 손님이 아닌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것. 그곳이 곧 약혼식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고, 그 방법에 있어 비상수법을 채택한 셈이다. 위험했다. 그러나 위험한 방법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분별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 아버지가 오사카에 방문해 청년을 만날 기회를 마련했을 때도 우연을 가장한 지혜를 동원했다. 그녀는 부친을 우연히 동일장소에서 만나게 된 친지로 소개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한 것이다. 그리고 부친으로 하여금 청년의 생각과 소신, 삶의 지향에 대해 주로 묻도록 사전에 주선했던 것 같다. 그녀가 청년의 신상에 대해 부친에게 말했을 테고, 그러니, 당사자에게는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이 부분이 민감한 사안인데, 사실대로 알려서는 안 되기에 그녀가 일이 성사되는 쪽으로 변용 각색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어머니를 잃고 쓸쓸해하는 딸을 늘 안쓰러워하던 부친은 딸의 청이라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그런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녀가 그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약혼의 당사자인데, 그도 약혼식이라는 위력 앞에서, 더욱이 만장한 친척 친지들 앞에서 더는 어쩌지 못하리라는 판단 하에 도모된 거사였으리라.
그러나 식이 시작되기 직전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가족과 친지들의 웃음꽃은 정원의 꽃들 사이에서 환했으나 막상 행복해야 할 두 당사자는 그녀의 용감하고도 무모한 모험의 덫에 걸려 함께 떨었다. 그 약혼식이 청년의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지려 한다는 것을 두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 긴박한 순간에 청년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그만큼 애절하고 간절했을 것이다. 그 눈빛이 간곡히 말하고 잇었을 것이다. 이 위기를 함께 넘자고, 함께 가기 위해 나로서는 고통스러운 숙고 끝에 이 방법을 선택했다고, 정상적인 방법으론 약혼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기에 이런 비상책을 사용했노라고, 나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힘 하나로 이 자리까지 왔다고, 그녀는 눈으로 말하고 침묵으로 소리쳤으리라.
청년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렵고 슬픈 운명의 순간,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그 무서운 순간을 맞고 있었다. 모친과 연인 사이에서 기진해 있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모친은 청년에게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일남 이녀 중 맏이이고 외아들인 청년은 그 어머니의 유일한 보람이고 긍지였다. 애정의 분배가 남편보다 자녀 쪽으로 기운 사랑의 경사(傾斜)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 그 중에도 맏이인 이 아들에 기운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 그러한 모친을 차마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반해 그녀는 좋은 조건과 배경을 지닌 전도유망한 아가씨다. 에로스의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이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나 부모는 이별할 수 없는 존재이고 보면 결말은 이미 나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청년은 흔들리는 자신을 겨우 가누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 부친에게 말했다. "나는 조선인이고 고향의 부모님이 일본 며느리를 원하지 않으실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약혼은 무리입니다." 그녀 부친의 얼굴이 이지러지고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분노한 부친이 딸에게 다그쳤다. 네 말과 이 청년의 말이 왜 이렇게 다르냐고. 그러나 즉시 상황을 감지한 부친이 쓰러질 듯한 딸을 부축하며 딸의 마음을 최대한 헤아리고자 했다. 평정을 되찾은 부친이 다시 너그러움을 베풀어 청년을 달랬다. "내가 자네를 세계적인 인물은 못 만들어줘도 국가적인 인물로는 키워주겠다. 그리고 부모님을 일본으로 초빙할 테니 이 약혼식을 거행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 회유의 제안은 나라 잃은 힘없는 한 젊은이의 마지막 자존의 불빛마저 사위어들게 했다. 청년은 그녀 가문의 조건에 탑승하기를 원치 않았다. 만일 성사가 순조로운 환경이었더라도 청년은 배경이 아닌 그녀 본인으로 족했을 것이다. 청년의 진심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하여 청년은 안간힘을 다해 가까스로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이에 그녀 부친의 격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저 하찮은 조센징이 이 자리에 불려나온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거늘, 감히 내 앞에서, 그리고 친지들 앞에서 용납키 어려운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 독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창백하게 질려 있는 딸을 향해서 "너는 오늘 우리 가문의 영예를 더럽혔고 내 위신에 먹칠을 했다. 이후로는 너는 내 딸이 아니다." 그 부친은 언어의 칼을 빼어 들고 딸을 단호하게 내리쳤다. 축하의 자리로 마련된 장소가 한순간에 충격의 소용돌이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 한순간의 전환은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무서운 비극을 몰고 왔다. 그녀는 그 길로 뛰쳐 나갔고, 열차가 달려오는 오사카 철로에 몸을 던졌다.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지독한 순정성이 죽음의 독배를 마시고 쓰러졌으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 죽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 부친의 명예가 이번에는 사회적으로 실추되고 말았다. 유학생 젊은이들 사이에서든 이 사건이 비련의 러브스토리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녀는 도교의 집으로 붙들려가 감금당했고, 청년은 오사카 경찰서로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취조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한다. 그녀 부친이 제안한 과분한 조건을 거절할 만큼 '조선인'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배후에는 어떤 불순사상, 즉 조선독립사상에 물들지 않았느냐 라는 혐의이고, 그러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서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으리라는 의혹이었다. 또한 그녀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한 추궁이었다. 수사당국은 오사카에서 그녀와 동거한 그녀 이모를 통해 그녀의 근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놓은 터였다. 이에 따르면, 그녀 어머니의 신주를 이모 집에 모셔놓고 매일 그 앞에서 정인(情人)의 평안과 복락을 간구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뤄 추론컨대 정인을 위한 정성이 지극한 그녀로서 어찌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청년 집안의 경제사정을 알기 위해 조선으로 신상 조사를 의뢰할 방침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그 무렵 고향집에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순사가 조사를 나올지도 모르니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라는 내용이었다. 놀라지 말라는 터에 더 놀란 모친이 아들의 신변에 닥친 불상사를 예상하고 불안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궁지에 몰린 청년은 그 마음이 더욱 지옥이었으리라. 자신의 처지도 처지지만, 그녀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자신의 처신으로 그런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심히 아파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의 현실 앞에서 홀로 울었으리라.
이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던져져 있을 때 곁에 다가와 준 이는 제자를 아끼는 일본인 교수였다. 힘내라 격려했고, 자책하지 마라 타일러 주었다. 그리고 팔을 걷어부치고 제자를 도왔다. 그는 경찰에 친히 나와 청년의 혐의에 대한 왜곡과 부당성을 밝히고 진실을 보증해 주었다. 교수의 명예와 책임 하에 청년의 신분을 보장받은 당국이 그제서야 청년을 혐의에서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청년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집은 철옹성이었으며 겹겹의 장막 속에 그녀는 죄인이 되어 갇혔다. 청년은 그녀를 만나보려고 염치 불구하고 그녀 이모의 주선으로 그녀의 의붓어머니를 비밀히 만나 사정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상태를 전해 들을 수는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문에 뚫린 구멍으로 끼니를 넣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번 식사를 거부하고 있어 정신도 몸도 부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청년에게 편지할 것을 우려해 그녀 방에서 일체 필기도구를 치워버렸다고도 했다. 누구와의 면담도 일체 불가하니 그렇게 알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유폐시키고 외부와 차단시키느냐고 청년이 항의했으나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청년과의 연결을 시도할 것이고 자살의 도구를 어떤 방법으로든 얻어낼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조카의 상태를 전해 듣고 그녀의 이모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친엄마라면 부군의 명이 아무리 지엄하다해도 저런 식으로는 방치해두지 않았으리라고, 거듭 흐느꼈다.
얼마 후 학업을 마치고 청년은 현해탄을 넘어 귀국했다. 귀국 당시 다른 짐은 다 버리고 왔어도 버리지 못한, 아니 오히려 소중히 챙겨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녀가 맨 처음 청년의 책상 위에 갖다 놓은 흰 꽃병과 양서들이었다.
귀가 후 청년은 망연자실 먼 하늘만 바라보곤 했다. 아들이 모친 눈에는 아무래도 수상했다. 시름에 겨운 아들의 얼굴은 날로 여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모친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들은 망설였다. 한참 침묵 끝에 결국 자신의 슬픔을 어머니에게 털어 놓았다. 위의 사연을 절절이 전해들은 모친의 눈가가 젖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좋은 것이 나 좋은 것인 줄 몰랐더냐? 네가 좋다면 나도 좋지. 그 불쌍한 애를 데려오지 그랬느냐!"
이에 벼락 맞은 듯 놀란 쪽은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시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예상을 했던들, 제가 왜 그리했겠습니까! 그 여자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청년은 그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울음을 아기처럼 엄마 앞에서 터뜨리고 말았다. 모친도 따라 울었다. ▩
* 수필집 『잃어버린 꽃병』에서/ 2013.2.28 <도서출판 황금알> 펴냄
* 김길나/ 전남 순천 출생, 1995년 시집『새벽 날개』를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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