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치료 에세이 『어른들의 사춘기』에서>
휴식
김승기
우리 집 초롱이가 소파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휴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우선 감기는 눈꺼풀을 내려놓고, 머리를, 다리를,
구석구석 모든 관절을, 근육을,
더 먹고 싶은 쏘시지 간식을, 하루 종일 뛰어놀고 싶은 운동장을,
자는데 건드리지 말라는 귀찮음을, 침대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을,
휴식이란, 내려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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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이기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
김승기
삼십대 초반의 K씨,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말문도 트기 전에 막무가내로 울음을 떠뜨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채 감당할 수 없었는지, 나중에는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휴지를 빼서 건네주는 것, 그리고 그 울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난 k씨는 다소 하소연하듯 자신의 실타래를 마저 풀어나갔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짜고짜 큰시누이가 열여덟 살 된 고등학생 조카를 저희 집에 데리고 들어왔어요.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남편과만 의견을 나눈 시누이도 밉고 남편한테도 섭섭했지만, 기왕 벌어진 일이니 어지간히 참고 지내며 나름대로 잘해주려 노력한 게 몇 년이 흘렀어요. 사실 남의 식구, 그것도 다 큰 조카와 신혼의 부부가 한 지붕 아래 살자니 불편한 게 왜 없었겠어요? 가끔 싫은 소리도 하고 다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큰 시누이가 뒷말을 해서 진짜 힘들었어요. 그 조카가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로 가고 나니, 이번에는 막내시누이가 사생아인 네 살 배기 여자애를 집에 데려다놓은 거예요. 아이는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질 않나 여간해서 말을 잘 안 들어 제 속이 썩어요, 썩어."
K 씨의 얘기는 마침표가 없을 듯했다. 그 장황한 서사극을 마무리하며, K 씨는 시댁 식구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에게 화를 내고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등 너무 버거운 존재들이라고 한탄했다.
"시댁 식구들은 죄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남편조차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제 얘기를 듣기보다 자기주장만 앞세워요.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다소 긴 이야기였지만, 시종일관 나는 K 씨에게서 단 한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항상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고 거절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궂은일을 늘 도맡는 형국이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주위 사람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는 기대 심리를 갖게 된다. 그 와중에 어쩌다 거절의 의사를 표하게 되면, 단 한 번일지라도 주변 사람들은 이를 서운하게 생각하고 기대에 못 미친 태도에 불같이 화를 낸다.
따지고 보면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란 힘들다. 오히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문
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자기주장도 하고 필요에 따라 거절도 잘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일 타산이 높다. 즉, 자신만 손해 보는 입장에 처해지기 쉬운 사람이다.
게다가 자기 자신의 손해를 감내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란 칭찬은 듣겠지만, 정작 K 씨와 같은 이들이 자기주장을 펼치려 들면 칭찬하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린다. 그때 착한 사람들은 K 씨처럼 어안이 벙벙해진다.
갑자기 K 씨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사람은 다섯 살까지 성격의 90퍼센트 이상이 형성되고, 그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갈등은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해결되지 않은 덩어리(콤플렉스)로 남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도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렸을 때 풀지 못했던 그 감정 속으로 저절로 빠져들곤 하는데, 사람들이 현재(Here & Now) 보이는 반응을 어린 시절의 감정 그 연장선상에서 살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K 씨의 어릴 적 부모는 허구한 날 자식들 앞에서 싸우고 그 분플이를 자식들에게 종종 해대는 모습이었다. K 씨는 그런 부모가 너무 싫었다고 한다. 결국 맏이인 자기가 오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내가 반듯해야 동생들도 따라온다.'고 생각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은 웬만하면하지 않고 항상 모범이 되려고 애썼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늘 양보하고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사람들을 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제가 미워요."
너무나 착하게만 보이는, 거절을 못하는 그녀에게 어떤 답을 줘야 할까?
휴지 빼주는 남자의
: advice :
사람들의 행복감이란 대부분 본능의 만족에 의존한다. 한 세기 전 본능 이론을 정립한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성욕과 식욕/수면욕으로 대표되는 자아 보존적 본능에 더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주장하고픈 욕구인 공격 본능을 주창했다. 그런데 이들 욕망이 막무가내로 억제되고 희생된다면 당연히 생활이 즐거울 리 없다. 마치 K 씨처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짜증스럽고 우울하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벌렁대어 잠조차 잘 자지 못한다. 소위 화병의 증상들이 나타난다. 게다가 K 씨는 불만스러운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자식들이 닮을까 봐 두렵기도 하여 모든 게 편할 날이 없다고 얘기했다.
의외로 K 씨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한결같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현대는 개성 사회라는 거다. 같은 것을 바라보고도 다른 생각을 품는 시대에 마냥 좋은 사람으로만 평가받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어차피 똑같은 일을 가지고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가? 자신의 장단에 춤을 추는 수밖에 없다.
까짓것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리하여 떠날 사람은 떠나가고 자신을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라고 내버려두라. 자신과 맞는 사람,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테고, 그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면 된다. 정말 그뿐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참 잔인하다. 한 번 기대기 시작하면 계속 의지하고 기대하려 든다. 나아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타성에 젖는다.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은 이런 상황에 부딪혀도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은 채 넌지시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파악해야 가능하므로, 아주 고단수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명료하다. 상대와 멀어질까 봐,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운 거다. 그러나 결코 거절은 영원히 상대와의 멀어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 자체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요구한 그 어떤 부분만 거절하는 것이므로, 부드럽게 거절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해 미안해하며 사과하면 될 일이다.
예를 들어 지인이 거액의 돈을 빌려 달라 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그것을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승낙할 것인가?
K 씨처럼 부담스런 일상을 전전긍긍하고 사느니, 친구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얘기하며 작으나마 융통할 수 있는 돈을 제안하거나 아니면 거절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상대방의 몫이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살아가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도 좋지만 재 존재가 우선이다. 남을 먼저 배려하다 보면 내 존재가 흔들린다.
내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야 하고, 그래야 자신과 맞는 사람들이 주위에 서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 해도 자신을 이해하고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막말로 그것은 헛방이다.
* 정신 치료 에세이 『어른들의 사춘기』에서/ 2013.1.16 <마젠타> 펴냄
* 김승기/ 정신분석 전문의, 2003년 『리토피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치고 힘든 분께 이 책을 권유합니다(정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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