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전영관_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 플라시보 당신 : 천서봉

검지 정숙자 2024. 4. 27. 02:37

 

    플라시보 당신

 

     천서봉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못 읽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수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발 다가서면

  또 한발 도망간다던 당신 격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전문,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2023. 문학동네)

 

 

  ▶ 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_전영관/ 시인

  1971년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서봉氏 아버지는 10년 넘게 독일에서 유학한 독문학자이시고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니 아버지에게 문학적 소양을 물려받은 셈이다. 물론 본인에게 내장된 특질이 있기에 그것들이 시너지를 냈을 것이다. 김광규, 황동규 같은 분들이 아버지 제자였다고 들었단다. 두 분이 집으로 찾아온 적 있다니 문학사를 듣는 듯 신기했다. 난 몇 번을 만나도 상대의 개인사는 묻지 않기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후일에야 들었다. 그제야 그간의 부러움(?)들이 풀려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께 물려받고 그런 환경을 가졌으니 그만큼 깊어졌으리라 생각하니까 끄덕여지는 것이다. 그는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3번이나 탈락되며 2005년 『작가세계』로 데뷔했다. 이전엔 윤성택 조동범 등과 교류했다는 말을 들었다. ko-ham 같은 무게감 있는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모습에서 공부가 깊다고 생각했고 내 게으름을 한탄하곤 했다. 바윗덩이를 놓아서 무겁게 만드는 건 초보이고 깃털을 쓰고도 천근만근 느끼게 하는 게 고수다. 서봉氏는 육식동물의 몸피를 가졌으면서 눈빛은초식이다. 만나도 떠들기보단 웃는 게 전부인 스타일이다.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추억은 단속적이다. 순서 없이 떠오르는 예전 일들을 나누고 부족한 기억을 채워주곤 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그간 소원했다. 육식짐승은 서로를 초대하지 않는다고 웃으련다. 서봉氏를 기억한다하기보다 그를 느낀다. (p. 시 152/ 론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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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10월(406)호 <커버스토리/ 작품론> 에서

 * 천서봉/ 2005년『작가세계』로 등단, 『서봉氏의 가방』『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산문집『있는 힘껏 당신』

 * 전영관/ 시인, 2011년『작가세계』로 등단, 『미소에서 꽃까지』『슬픔도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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