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타고 나면
전길구
바람 없는 여름 한낮
그림자가 타오르고 있다
그림자가 타고나면 무엇이 남을까?
열 살 무렵
도시 구경하겠다고 찾아간 대구에
짐 자전거로 빙과 배달을 하던 삼촌이 있었다
회색 벌판 위에 군림君臨하던 태양은
자전거 뼈대를 달구고
한낮 짧아진 그림자는
숨 가쁘게 페달을 밟았다
까맣게 탄 등허리를 구부리고
달그락거리며 늦은 저녁을 삼키던 삼촌
집도 사고 트럭도 사고
포도 넝쿨 같은 시절도 있었지만
칠순 앞에 얻은 것은 폐암肺癌
곁을 떠난 적이 없던 매연과
고단했던 검은 저녁과
타오르던 그림자는 응고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속에 눕던 날
유독 밝았던 한 사람 몫의 햇살
그림자가 타고난 자리에는 하얀빛만 남아있었다.
-전문(p. 103-104)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서정시학> 펴냄
* 전길구/ 2021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수상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동 도루묵 지붕/ 노해정 (0) | 2024.03.27 |
---|---|
모자 벗은 여인/ 황규영 (0) | 2024.03.27 |
고통의 간격/ 최은진 (0) | 2024.03.25 |
개와 늑대의 나라/ 정우진 (0) | 2024.03.25 |
파동/ 이영란 (0) | 2024.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