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외 1편
유정
까치 바람이 사르락 눈 밟으며 지나갔어요
지난밤을 뭉텅 선잠에 빼앗기고 부신 눈 비벼
창문을 여니 마당 위에 찍힌 발자국이 삐뚜름해요
아, 눈밭 길 걸어 온 아침 기별은 덜컹했어요
금쪽같은 청춘이 홀연 생의 껍질을 벗고 떠났다니요
천 근이나 되는 슬픔의 덩어리를 물고 온 까치는
눈길 밟아 밤을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애달팠을까요
톡톡 문자를 수신한 새의 발자국이 푹푹 젖어 있어요
어쩌나요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참척의 아픔을
혹독하게 견디고 있을 남녘의 그녀, 문자 두드려
슬픔을 공유한다는 한 단락의 문장이 무슨 위로가 될까요
무너지는 가슴을 부축해 줄 단단한 어휘가 없다니요
행과 행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와르르 쏟아져요
바깥엔 누군가 새벽바람을 굴려 만든 눈사람이 서 있어요
열흘 아니 사흘이면 꽃 지듯 사라질 볼 빨간 눈사람에게
짧은 생의 깊이를 물어요 눈썹 끝에 달랑거리는 동그란
눈물은 시작일까요 끝일까요 피고 지는 일이 그렇듯
-전문(p. 45)
-------------------------------
저녁 무렵 자전거
오래된 골목길 좁은 담벼락에 지쳐 쓰러진 당신을 보았네
휘파람 소리 새벽을 깨우며 나간 하루가 가계를 꾸리던 날들
잡초 더미 속에서 반백이 되어 두 눈을 감고 있었네
고단한 그림자를 페달에 실어 힘차게 밟고 오던 당신의 저녁
그런 날 밤이면 베개 밑으로 신음 소리 강물로 흘러내리고
당신의 허리는 잠들지 못해 온 밤을 뒤척이었지
파꽃을 즐겨 심던 마디마디 손끝이 어느새 껍질이 되어가고
마른기침 잦아진 흙투성이 발자국에 석회가 끼고 있다는 걸
적막한 시간들이 무심히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당신의 뼈들이 시들고 부서지는 동안 철없이 피어나기만 했던
지난날이 슬퍼져 담벼락에 기대 누워 있는 당신에게
풀꽃 한 다발 눈물로 바치고 돌아서네
휘파람 소리 자전거에 실어 돌아올 것 같은
저녁 무렵
-전문(p. 29)
-------------------------
* 첫 시집 『바람의 문장』에서/ 2024. 2. 5. <코드미디어> 펴냄
* 유정(본명, 박경옥)/ 2008년 『문파』로 등단,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0) | 2024.03.19 |
---|---|
맥심모카마일드믹스/ 조명신 (0) | 2024.03.19 |
연민/ 유정 (0) | 2024.03.18 |
간절곶 외 1편/ 김안 (0) | 2024.03.17 |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김안 (0) | 202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