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내일로 이어지는 날들이 텅 빈 운동장에 부는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가슴을 시리게 한다 꽝꽝 언 대야 속에 밀어 넣는 바가지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그 위를 빙빙 돌고 찬물은 손가락 사이사이 성난 가시처럼 파고든다 마른세수하고 나온 거리엔 먼지처럼 눈이 내리고 케이크 상자를 든 들뜬 손들 너머 곱은 손으로 빈 박스의 테이프를 뜯어낼 때 리어카 위 멸치박스에도 눈은 쌓인다
그리고
텅 빈 버스정류장 온열 의자에 앉아 해진 목장갑 겹겹이 낀 손 엉덩이 아래 밀어넣고 한숨 돌릴 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
여보세요
엄마는 왜 그래
내가 뭐 어쩐대
그게 그렇게 아까워
너는 참말··· 징하게 너무한다
내가 좀 필요해서 부탁하잖아 엄마 아직 아침, 점심도 못 먹었어야 평소에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함 듣는 둥 마는 둥 물어보면 대꾸도 않고, 버튼 누르는 소리나 내고, 그래 놓고 돈 필요하면 전화 넣는······
엄마가 뭘 그렇게 해줬는데
고물 한 수레 실어도 3,000원 받기도 어려분디, 리어카는 또 얼매나 무겁고 날은 또 얼매나 춥간, 손구락도 시렵고 발구락도 시려워야, 나도 낼모레 마흔이고 나도 육십 중반여, 니는 엄마가 불쌍치도 않어
아 몰라, 지겨워
길 건너 시장 입구에서 빈 고무함박을 옆구리에 낀 낯익은 얼굴 하나가 이름을 부르며 건너온다
수제비 좋아하지
수제비요
뜨신 거 먹으러 가자
어디서 한데요
가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설 때 파도처럼 밀려났던 인생이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간다 수없이 부딪혀 이젠 뼈 마디마디가 부서진, 바람 빠진 고무인형 둘이 시장초입 국시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p. 1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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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뽑을 수 있나요?
문간방 선희는 종이뽑기를 잘했어
문어발 뽑기는 더더욱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냥 촉 같아
오죽하면 뽑기 집 아줌마가
야, 넌 하지 마, 했겠어
사실 선희는 문어발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백 원이 생기는 날엔 뽑기를 했어
게임당 50원 하던 문어발 뽑기 앞에서
심호흡하고 손가락 끝에 기를 모으는 척 뽑기 판을 탐색했지
점찍어 둔 종이가 있었지만
주인아줌마와 또래 남자애들에게 보이는 소맨십이었지
역시나 백발백중
제 손바닥보다 큰 문어발 두 마리 들고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삐그덕,
철제대문 뒤로 밀고
방문 앞에 앉아 나무판에 낚싯바늘을 꽂던 엄마가 반겨주면
내보인 문어발 두 마리
어디서 났냐
부모님이 문어발 장사하는 짝이 줬어
얼버무리며 문어발을 구워 와선
제일 긴 다리 뜯어 엄마 입에 넣어주지
너도 어서 먹어
엄마를 보며 빙그레 웃던 선희
오늘도 참새방앗간처럼 김제시장통 초입 건어물 가게를 서성거려
열 배는 더 큰 문어발들
주인여자에게 씁쓸한 미소로 화답하곤
청과물 파는 곳으로 걸어가
주머니 속 지갑을 꽉 움켜쥔 채로
이젠 큰 걸로 사드릴 수 있는데
수없이 혼잣말해
-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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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엄마를 뽑을 수 있나요?』에서/ 2024. 3. 10. <시산맥사> 펴냄
* 조명신/ 1980년 전북 김제 출생, 2022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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