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유정
내가 자꾸 기울어 갑니다
가깝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득해지고 신음처럼 흐릿합니다
소리가 멀어지고 어깨가 헐거워 중심이 흔들립니다
저녁 빛이 서늘해 잔뜩 웅크립니다
시간이란 것,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것
동쪽에서 밝아 와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하루치의 햇볕 같은 것
움켜쥐려고만 해서 내가 빨리 아득해진 걸까요
늘 경계만 하다가 귀가 점점 멀어진 걸까요
포장된 껍데기 속을 탈출한다면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저물어가는 눈썹 끝에 희디흰 초승달이 뜹니다
아직은 낮달이라고 우기고 싶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릅니다
낡아서 해진 옷자락을 여미며 서 있는 빈 들의 바람 같은
저녁이라는 적막한 이름,
애잔한 당신
-전문-
해설> 한 문장: "내가 자꾸 기울어갑니다" 시 「연민」의 도입부 첫 행이다. 삶은 늘 예측하기 어려운 곡선을 보여주곤 한다.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지수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제시하는 「연민」은 저물어가는 인생 전반의 도표를 그려내며 아득하고, 헐거워지고, 웅크리는 '기울기'에 대한 심도 깊은 서늘한 저녁 빛의 소묘이다. "동쪽에서 밝아와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서쪽 어둠의 필연적 슬픔에 대한 간극을 나타내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버린 시간의 아쉬움이다. "움켜쥐려고만 해서 내가 빨리 아득해진 걸까요/ 늘 경계만 하다가 귀가 점점 멀어진 걸까요/ 포장된 껍데기 속을 탈출한다면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그날이 폭죽처럼 선명한 그림자를 그려내는 것이다. (p. 시 23/ 론 119) <지연희/ 수필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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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바람의 문장』에서/ 2024. 2. 5. <코드미디어> 펴냄
* 유정(본명, 박경옥)/ 2008년 『문파』로 등단,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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