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낙타의 문장/ 이학성

검지 정숙자 2024. 3. 2. 02:27

 

    낙타의 문장

 

     이학성

 

 

  생각이 막힐 땐 낙타를 업고서 사막을 건넌다고 상상하지. 검푸른 하늘에 박힌 뭇별들을 거룩한 안내자 삼아 닷새째 나가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 전까진 낙타를 내려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꼬박 낙타를 떠메고서 사구를 넘자니 발목이 모래무덤에 빠지고, 위안을 구실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업힌 낙타는 마치 몹쓸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생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러니 어서 마을로 낙타를 데려가야 해!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라 상상을 서두르지. 아무리 병든 낙타라지만 순한 새끼양보다 가벼울 리 있을까. 대관절 낙타를 업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나서서 뜯어말릴 만도 한데 아직 그러는 이는 없어. 온종일 걸어도 낙타가 무겁게 침묵하는 까닭과 일평생 떠맡아 온 등짐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겪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어. 끈질기게 재칼의 무리가 따라붙으려 하지만, 그래도 사막을 가로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낙타의 마을에 닿으리라 터벅터벅 행로를 고집하지. 행여 지치려고 해도 그의 마을에서 새겨지게 될 문장은 무얼까, 기대와 궁금증이 혼미해지는 상상을 부축해 세우지. 그런데 알아? 누구든지 한 번쯤은 낙타의 문장을 얻겠노라 먼 길을 헤치는 상상이야 하겠지만 낙타라는 존재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어설프게 다가가 등을 내밀었다간 아찔한 곤욕을 치른다는 걸.

    -전문(p.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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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신작시> 에서

  * 이학성/ 1990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여우를 살리기 위해』『고요를 잃을 수 없어』『늙은 낙타의 일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