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한영숙
오 육백 년 된 회화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 둘레는 어른 몇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속에 담겨진 자기 삶을 관조하는 걸까. 나무는 묵묵히 제 발치만을 내려다보고 섰다. 고작 반 세기를 살아온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넓이를 지난 나무였다. 또한 여름 한 철이면 매미들은 그 나무의 끝 간 데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기도 했다.
회화나무와 매미 그들이 들려주는 저 무언의 설법을 나는 조용히 받아 적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한 그루의 고목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심상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다만 나무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다. 그 시선 역시 고목에 고정되어 있기에 이 시에서 물리적인 운동성은 대체로 자제되어 있다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가 여타의 다른 시들 못지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욱 큰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정지되어 있는 화자의 육신과 시선과 달리 그의 내면은 고목으로부터 추동되는 여러 감정으로 인해 헤어나올 수 없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요동친다는 표현으로 인해 그 심리가 정리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릇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이 요동은 외려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화자의 시선을 멈춰 세운 고목의 자태가 혼란스러움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시간성을 초월한 깊이와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삶의 지향을 촉발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내면의 요동은 외면의 부동성과 대비되면서 동시에 어우러지며 존재의 내면을 고양시킨다. 요동이 주체의 혼란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끄집어내는 것이 비로 이 요동의 실체인 셈이다. 그것을 화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긴 세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세계를 지탱해온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깊이와 넓이를 존재의 결여된 지점에 받아들이는 일이며, 이는 곧 "무언의 설법을 나는 조용히 받아 적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을 비롯한 지상의 세계가 단지 인간만으로 구성된 것도, 인간과 친연성을 가진 존재들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며, 긴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오래도록 지속되는 흐름으로서의 생의 맥동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p. 시 93/ 론 131-132) <임지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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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카멜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에서/ 2024. 1. 30. <여우난골> 펴냄
* 한영숙/ 2004년 『문학 선』으로 등단, 시집 『푸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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