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물의 무늬 2/ 이종천

검지 정숙자 2024. 1. 30. 00:40

 

    물의 무늬 2

 

     이종천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야 한다고 믿었지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작아지고 아래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투명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있지만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내심 불안하지만 그래도 맑다는 건 좋지 않을까

  수평이라는 건 중심의 무게야 어떻든 간에 고르게 펼쳐진 평등이라 믿지만 잠차 많은 곳으로 기울어지는 건 원칙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여운이었어

  헤어진다는 건 떨어져 나간다는 것 의미 없는 슬픔인지 모르나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란 빈껍데기의 빈말이었을까

  앞서가는 파도를 밀고 가는 파도처럼 밀어주는 바람을 뒤따라 밀어주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생의 아케이드를 거닐며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인은 이제 하나의 테제의 공간, 사유의 공간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른다. 그것은 익숙한 것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 재정비하는 사유의 전환을 보여준다.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야 한다"는 세상의 원칙은 모세계를 파악하는 진실이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중심의 무게"가 수평이라는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으로 힘과 방향성을 지닌 벡터의 자연스런 원리이자 여운이라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헤어짐이라는 사건은 만남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란 빈껍데기의 빈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부유부쟁 고무우夫唯不爭, 故無尤"(노자, 『도덕경』), '다투는 일이 없으니, 허물을 남기지도 않는다' 노자의 전언처럼 "앞서가는 파도를 밀고 가는 파도처럼 밀어주는 바람을 뒤따라 밀어주는" 세상의 무늬를 시인은 담담하게 부려놓는다. (p. 시 62/ 론 106-107) <전형철/ 시인 · 연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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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래된 무늬처럼』에서/ 2023. 12. 5. <상상인> 펴냄

  * 이종천/ 2012년 시집 『그가 보고 싶다』로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