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및/ 송병숙

검지 정숙자 2024. 1. 13. 01:04

 

   

 

    송병숙

 

 

  어둠 속에 섬처럼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제 할 일 다 하고도 사라지거나 다가오지 못하는

 

  조각조각 부서지는 영상을 본다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에서 '및'이 조각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갓난아기를 업듯 가진 무게를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걸치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및'

 

  사이가 돈독해진 이웃들이 이웃을 부른다

  그리고, 또, 그밖에

  뛰어내린 햇살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한 덩어리로 출렁이는 끈끈한 적수들

 

  오늘도 독립을 꿈꾸는 '및'이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그러지 않고도 싶은 저녁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체 공휴일 같은 평화주의자가

  결단을 유보한 채 건들거리며 걸어간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시 「및」이다. 이 시는 곁을 불러들이는 말이 사라진 시대에 필요한 말을 사유한다. '및'이라는 기표가 그 자체의 목소리를 지녔다는 점에 주목하면 바짓가랑이를 움직여 가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연필 끝을 눌러가며 쓰고 있거나 워드프로세서 자판을 두들겨 '및'을 만들어내는 시인의 자세를 연상하면 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시적 화자는 이 기호의 본성을 "평화주의자"로 보면서 "대체 공휴일"에 빗대어 어떤 가외의 평화가 주어지는 정황을 이야기한다. 이 같은 상상력은 그가 현대시를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으로 진단하는 데서 출발하고, 그의 심리를 움직이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어떤 "영상"이라는 데에 있다. 우선 "디지로그'라는 합성어, 즉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 analog의 융합 요소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시인의 의도를 짚어 보아야 한다. 첨단기술과 보편적인 기술 간에 우위를 두지 않고 사이좋게 어깨를 겯는 관계성을 시인은 생각한다.

    (···) 

  접속부사라는 '및'의 속성과 '디지로그'라는 융합적 속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시는 태어났다. 사전의 정의에 가두지 않고 '및'을 과감히 이탈시킴으로써 걸어가는 및, 곁의 언어를 불러들이는 및, 언어기호 그 자체가 지닌 연금술로 좌우에 위치한 기호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불특정인인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는 및의 접속성이 이때 확연해진다. '및'은 곁의 생명체, 곁의 사물들을 데리고 나타나면서 비로소 그 위상이 드러난다. 상호 섞일 수 없는 타자적 관계이지만 양자를 '및'이 중개하면 수평적 관계가 조성된다. 시인은 및의 존재감을 다른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는 "햇살"로 비유하면서 이 부사를 평화로움을 조성하는 공평성의 언어로 여긴다. 그런 만큼의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서 및이 좌우의 "적수들"을 "한 덩어어리로 출렁이"게 하는 융합의 세계가 펼쳐진다. (p. 시 19/ 론 128 (···) 130) <김효숙/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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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 씨와 모 씨에게』에서/ 2023. 12. 16. <상상인> 펴냄

  * 송병숙/ 1982년『현대문학』추천, 시집『문턱』『'를'이 비처럼 내려』『뿔이 나를 뒤적일 때』, 시산문집『胎, 춘천 그 너머』, 춘천 봄내중학교 교가 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