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냉장고 구역/ 정월향

검지 정숙자 2024. 1. 5. 15:25

 

    냉장고 구역

 

     정월향

 

 

  비가 온다. 가을 느낌으로 온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브랜디 칼리 가빈 제임스 너버스 카나 그린나스를 넘어서 비가 내린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라고 친구는 말했다. 냉장고를 끌고 가는 사람이 비를 맞는다. 빗방울이 동그랗다. 바닥이 온통 동그라미다. 저것도 맞고 이것도 비를 맞는다. 인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뭇잎이 끄덕인다. 나무의 겨드랑이가 받아들인다. 서늘함을 받아들인다. 냉장고의 바퀴가 젖는다. 젖은 흙이 냉장고에 달라붙는다. 냉장고 속으로 흙이 들어갈 것 같다. 흙이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무수한 빗방울과 무수한 서늘함을 생각한다. 흙을 건너는 사람을 생각한다. 죽음이 가득한 무더기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생각한다. 지나가는 냉장고는 무수하지 않다. 서늘함은 무수하지 않다. 도로가 흙에 덮인다. 차선이 흙에 덮인다. 사람이 흙을 건넌다. 무더기가 무너진다. 비 올 때마다 가을이 온다. 잎들이 무너진다. 나무가 무너진다. 비 오는 공원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 같다.

    -전문(p.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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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파란> 펴냄

 * 정월향/ 2019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부문 & 2021년  진주가을문예 시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