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퐁피두/ 장선희

검지 정숙자 2024. 1. 3. 01:56

 

    퐁피두

 

    장선희

 

 

  미술관은 커다란 공장 같았지

  외벽은 여러 개의 파이프가 붙어 있었어

 

  햄스터 관 같은 투명 파이프 에스컬레이터로

  수많은 관람객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프란시스 알렉스의 행위예술 같았어

 

  나야 뭐, 전공자도 아니고

  미술은 상징이고

  너머의 의미를 상상해도 된다는데

 

  그 시간, 지중해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어

  구호품과 구조견도 비행기를 타고 현장에 갔지

 

  구조하던 사람들이 여진에 다치고

  기자들이 취재 도중 대피하는 장면도 화폭이 될까?

 

  아이들이 울부짖어, 피카소도 울부짖어

  잔해 속에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

  게르니카 속 다리 하나도 툭,

 

  둥근 지구는 사용 설명서가 더 복잡해지고

 

  뉴미디어 전시관엔 설명 책자가 놓여 있었지

  왜 당신은 이해하려고만 하십니까, 그림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샤갈, 칸딘스키, 달리, 앤디 워홀

  속을 감추고

  겉만 보여 주는 현실의 상징체들  

  

  그림들이 점점 엷어져, 형체와 색이 소실되더니 시커먼 연기만 자욱했어

  뼈 같은 프레임만 걸린 전시실

 

  소방관의 다급한 얼굴 위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쏟아졌어

  여진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희망의 말을 화염 속에 던졌을까?

 

  허공을 손톱으로 긁는 사람들 속에

  내가 앉아 있어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얼굴로

 

  캔버스 속 물감으로 감춘 지진,

  붓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을 놓아주고 싶었을까

  계단이 추상에 기대다 추락하는 자세로 멈춰 있어

     -전문(p. 13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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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파란> 펴냄

  * 장선희/ 2012년 웹진 『시인광장』으로 등단, 시집『크리스털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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