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
정창준
못자리를 파내야 하는 날
덜어 낸 자리에는 기억이 차오를 것이다 마음은 붉은 무릎 같은 비탈을 만들어 왔다 비탈은 웅덩이를 만들지만 모든 웅덩이가 생명을 키우는 것은 아닐 터,
더운 빗줄기가 되고 싶었던 철없는 시절, 나는 조바심을 갖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래서 나는 궁금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절대 묻지 못했던 물음
남쪽에서는 오늘을 기다려 나무가 속에 담아 둔 체액을 모아 마신다고 했다 물푸레나무가 차곡차곡 접어 둔 기억을 받아 마시면 다툼이 없어진다는데, 이방인에게 더 효험이 있다는데, 곡우란 먼 곳에서 올 사람을 아침부터 기다려야 하는 날
다툴 수 있는 관계라도 되고 싶었습니까?
절대 답하지 못했던 물음
솔가지를 덮고 볍씨를 불리듯 당신의 먼 어린 날을 생각한다. 너무 자란 당신,
뜻이란 없는 것을 꿈꾸는 일이었구나. 담을 곳이란 결국 채워진 것들이 비워진 자리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봄날
침엽수처럼 푸르다고 자부하였으나 길러 낼 것 없는 마음만 후벼 파고 있었구나 송화가 이끌고 올 노란 봄날을 기다리면서
안은 결국 안이었고 말은 결국 말이어서
차갑고 미끄럽게 스치던 대화들
오늘 밤 조기 떼가 이방인처럼 울면서 간다
격렬비열도 같은 당신에게 간다.
-전문(0.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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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시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파란> 펴냄
* 정창준/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아름다운 자』『수어로 하는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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