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검지 정숙자 2023. 8. 29. 01:55

<2006, 제1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 중에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않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전문(p.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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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35회 지용제 사화집 『어머니 범종소리』/ 2022. 9. 14. <옥천군· 옥천문화원· 지용회> 펴냄. (비매품) 

  * 강은교/ 함경남도 홍원군 출생, 1968년 『사상계』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허무집』『풀잎』『빈자 일기』『등불 하나가 걸어오네』『소리집』『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벽 속의 편지』『붉은 강』『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초록거미의 사랑』『네가 떠난 후 너를 얻었다』『바리연가집』『봄무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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