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공동작업실/ 김이듬

검지 정숙자 2023. 5. 11. 02:59

 

    공동작업실

 

    김이듬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길게는 2년 더 연장할 수 있지만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어둠 속에서 얘기하기로 했다

 

  창밖에 벽이 있다 시멘트 위를 덮은 담쟁이는 없다

  전망을 방해할 만큼 큰 나무도 없다

 

  밤비 내리고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말한다

  건기는 멀었다고

  자신의 어머니는 달빛을 사랑하여 몽유병자가 되었다고

  우리는 빛을 향해 달리지 않았다

  낮이 어두웠기 때문에 밤에 불 켜지지 않는 태양광 전등처럼 정직하다

  더러는 소용없는 인간이라고 불렀다

 

  작업실은 무엇일까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벽 너머 공동주거지 골목 끝에는 피아노가 있는 작은 연습실이 있고 루마니아 작가가 죽은 가스실은 세상 끝에도 없을 것 같은데

 

  끝까지 가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책상이 있는 한 다른 가구가 필요 없다는 게 사실일까

  불쑥 나타나 있고 싶은 만큼 머무르다 떠나도 괜찮을까

  가스가 없어도 살 수 있을까

 

  밝힐 수 없는 공동작업실 창가에는 자르고 싶은 나뭇가지가 없고

  가시 속으로 파고드는 새도 없고

  월광도 없다

 

  나는 바깥에 세워두고 온 전동 킥보드를 생각한다

  누군가 그걸 타고 여름정원으로 가면 좋겠다

  만약 밤새 비를 맞고 서 있는다면

  기다란 목덜미 같은 손잡이에 악령이 내려앉는다면

 

  요즘 나는 사물에게 친분을 느끼는 이상한 뿔이 생겼다

 

  보여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피리 소리를 내는 이 뿔을 모자로 덮어두거나 비밀서랍에 넣어둔다

  언젠가 방랑을 떠날 것이다

  태양광 랜턴을 가지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얼굴을 모르는 구성원들이 개작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깥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다

 

  하루 남았다

  구전되는 초원 이야기처럼

  매우 긴 시간이다

    -전문(p. 15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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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역대수상자 작품_에서/ 2021. 10. 1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김이듬(2015년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2001년 계간『포에지』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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