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2023, 80세)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전문-
▣ 순은으로 반짝이던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를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왜 내가 그렇게 제 가슴이 뛰었던지요. 그것은 이 시의 감각과 상상력이 그만큼 참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설가로, 아동문학가로,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보는 문호文豪형 시인이었습니다. 지난 해 후배 시인들이 마련한 팔순연에서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시협의 선배 회장님으로서 자문을 구하면 "나는 유 시인과 생각이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이제 모습과 소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 가 계십니다.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리운 오탁번 선배님이시여. ▩ (유자효/ 현) 한국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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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半年刊誌『한국시인』 2023년 Vol. 04 <한국의 명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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