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책상과 싸우다/ 서안나

검지 정숙자 2010. 10. 27. 01:31

  

    책상과 싸우다


     서안나



   1

   가짜 고백은 모두 책상 위에서 탄생한다 나는 책상을 모르고 의자를 모른다 나는 모르는 책상과 모르는 의자가 만든 고백이다 나는 책상에서 태어났다


   2

   나는 지워질 고백이다


   3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사서들이 달콤한 역사를 굽고 있다 불타는 서랍을 닫았다 혁명의 깃발을 높이 쳐든 사람들이 두 번째 서랍에서 펄럭거리고 있다 나부끼는 서랍을 닫았다 배신자를 처단한 자들의 칼끝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피가 묻은 세 번째 서랍을 닫았다


   4

   책상에 앉아 피가 지워진 문장을 읽는다 역사는 정당하다는 대전제를 흠모한다 모든 고백은 두괄식이다 정치가의 연설은 오히려 문학적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 1 혹은 국민이란 명사로 분류된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질문은 낙서처럼 쉽게 지워지곤 했다


   5

   어두운 책상에 앉아 미완의 혁명을 나열해본다 로베스피에르 체 게바라 간디 달라이라마 조명탄처럼 반짝이며 망명하는 문장들 우리는 실패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어둠의 뺨을 때리며 꽃이 피는 새벽 나는 지워지는 사람 2가 되어 책상과 싸운다



 

   *『열린시학』2010-가을호 <열린시학 초대석, 오늘의 시인 신작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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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안나/ 제주 출생, 1990년『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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