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우유부단 외1편/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10. 11. 12. 02:31

 

    우유부단


     김상미



  나는 27층에서 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에 내리면

  긴 복도 중간쯤 내가 일하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나는 잡지나 책에 실릴 글들을 다림질해 주거나

  잘못 쓴 글들을 수선해줘

  때로는 통째로 다시 써야 할 때도 있어

  그럴 땐 정말 죽고 싶어져

  뻔뻔하게 닳고 닳은 교활한 문장에

  반듯한 새 옷을 입혀주는 일

  정말 사람으로서 못할 짓일 때가 더 많아

  돈 몇 푼에 양심을 팔아넘겨

  햇빛이 아주 많이 필요한 사람처럼

  뼛속까지 파리하게 창백해질 때가 많아


  하루는 내 옆에서 일하던 한 여자애가

  나보다 더 지독하고 뻔뻔한 글들을 수선하다

  27층에서 뛰어내려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어

  아직도 희미하게 핏자국이 남아 있는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언제까지 나도 이 짓을 해야 하나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저자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시대,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갖고 떠난 그 여자애가

  은근히 부러워질 때가 많아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일을 하고 있어

  한껏 나 자신에 비위 상하면서도

  그 슬픔이 피워대는 짙은 담배연기에

  콜록콜록 숨 막혀 하며

  무섭도록 순수했던 내면이 온기 하나 없는 무관심의 공터로 변해가는 걸

  쓸쓸히 즐기고 있어

  상심해 우는 사람들과 잔뜩 기대에 부풀어 내일로 가는 사람들이 만

들어내는

  뻔히 보이는 진실과 눈뜨고도 보이지 않는 거짓 사이에서

  그 어떤 문법학자보다도 더 착하고 성실한 우유부단으로!

  -전문-


*『서시』2010-가을호에서 나는 이 시를 읽었다(2010.10.26-02:40). 그리고 오늘, 해묵은 과월호를 읽다가 김상미 시인의 시 한 편을 또 읽게 되었다(2010.11.12-01:00).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읽지 못하고 쌓아둔 잡지가 산더미다. 올해는 그 ‘과월호들을 다 읽는 해’로 정했는데 웬 걸! 밀려드는 잡지가 또한 40종에 이르니 그것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달아난다-달아났다. 게다가 읽을 책이 어디 잡지뿐인가. 시간을 사냥해올 수 있는 거라면 어떤 무기라도 들고 나섰으리라. 아무튼 2010-가을호를 모두 일별하고, 아직 겨울호가 날아들기 전이라 잠시 얻은 틈으로『현대시학』2007-12월호를 읽었다. ‘읽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읽는 시늉’을 했다고 봐야 옳다. 한눈에 한 페이지를 팍팍 찍어 넘기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스쳐도 간혹 눈에 박히는 글귀가 있다.



   고독한, 프리랜서


    김상미  



  그와 동거하고 싶다

  함께 산다는 것

  그런 맛을 맛본 적이 없다


  탐하는 눈도 손가락도 입도 없이

  골똘하게 페이지를 넘긴 무수한 세월


  사냥개가 없으면 들고양이라도 데리고

  밤새도록 그를 사냥했어야 했는데


  봄밤은 가고

  아카시아 꽃잎도 지고

  쓸쓸함에 몸 둘 바 모르는 태양만이

  한결같은 내리사랑 내 안에 퍼붓고 있다


  지금은 가을. 가을은 가슴을 찢는다.*

  그와 함께 이 가을의 쓰라린 열매다 되고 싶다

  따기만 해도 주르륵 슬픔이 온 세상을 적시는

  목적도 계략도 안식도 없이


  그와 함께 날아오르고 싶다

  천상의 별자리가 아닌

  깊고 깊은 땅 속

  불타는 한 몸 씨앗으로!

  -전문- 

 

  *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가을」중에서


---이게 바로 오늘 읽은 과월호『현대시학』2007-12월호에서 저절로 눈에 들어온 글이다. 올 가을의 신작시와 3년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이 이렇게도 똑같은 정서를 품고 있다니! 김상미 시인의 성실함과 진정성이 내 심연에 쿵! 하고 떨어져 애달프게 퍼져나간다.  ‘과월호는 읽어서 뭘 해’ 한꺼번에 묶어서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위에 적은 시 두 편을 나란히 대하고 보니 ‘과월호를 어떻게 그냥 버려’ 라는 결론에 이른다. 과월호에 보관된 문우들의 지난날을 과월호가 아니면 어디서 펼쳐볼 수 있단 말인가. 여느 시인의 작품 또한 당월호의 신작시를 보는 느낌과는 다른, 별개의 편안함과 궤적이 소중하고 신기하다.  

---밤이 깊었으니 이제 그만 컴퓨터도 쉬게 해줘야겠다. (2010.11.12-02:19 劍智 정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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