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전문
글귀신 씌인 우리가 설 자리는
김지연/ 소설가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 전통적인 관습붕괴를 비롯 분야마다 첨단의 문명 지향으로 나날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50년 후에는 현재 인구에서 1천 4백 명이 줄어들고, 노인 천지가 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정책 입안자들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 지속을 멈추고 변화에 적절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도 역설한다.
우주의 섭리에 의한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 해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선명하여 당황스럽다.
문화 예술 전 장르의 상황도 확연히 달라졌다. 10년 20년 30년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데도 특히 문학 예술인들은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 적응하고 있다.
문학동네의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이 종이로 만든 책을 읽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린 점이다.
'가을 독서'라는 말은 진작에 없어졌고 전철 등 대중교통 어디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당연한 과정으로 동네 서점들이 폐점되고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신간 책 광고 또한 없어졌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길거리에 문학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활용 가구나 헌옷 보퉁이가 쌓여 있는 곳에 책 더미도 쌓여 있다. 1960~70년대 거실의 유리문 달린 책장에 책이 주루룩 꽂혀 지知적이고 품격 있는 집안 분위기로 장식되던 소중한 서적들이, 더러는 찢겨지고 더러는 겉봉투도 뜯겨지지 않은 채 길바닥에 처박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문예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하물며 보낸 사람의 사인을 그대로 둔 채 폐기된 시집 수필집 소설집들도 있다.
그간 장서를 자랑하던 소장가들은 말한다. 도서관에서 책 기증을 받지 않고 벽촌 오지나 군부대에서도 받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고···. 도서관조차도 매해 구입하는 신간新刊 놓을 자리가 없어 처리하는 업체에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니···.
최근 어느 문화원에서 그 지역 문인협회와 도서관을 통해 서적(문학· 인문학 전반)을 무한정 기증받아 '사랑의 도서나눔' 행사를 역세권 주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것을 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면쪽으로 칸칸마다 책들을 쌓아놓고 오르내리는 시민들이 마음대로 골라 주최측에서 마련한 쇼핑백에 가득 담아 가기도 하고 최소한 두세 권씩은 골라서 가져갔다. 주최측은 도서무료기증으로 끝내지 않고 최근에 작품집을 출간한 시인 · 소설가를 초빙하여 주변 빈자리에 미니책상을 마련 사인회와 시낭송회도 아울러 개최하여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시민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 길바닥에 종이책이 버려지는 시대에 시민들에게 책을 사랑하고 읽게 하려는 그 문화원의 행사가 유독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콧속을 시큰 따뜻하게 다가왔다.
창작집은 어떤 장르이든 문인들의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그릇이자 작가 그 자체이다.
세상의 관심이 이렇듯 멀어지고 글 값으로 생계가 유지되지 못하는 최악의 시대인데도 신기롭게 문인은 해마다 증가하여 현재 1만 5천여 명에 이른다. 문협에 입회하지 않은 각 동인지마다의 회원들을 총합하면 2만여 명에 이를 것이다. 60년 전 한국문인협회 창립 당시 3백여 명이었음을 유추해보면 숫자상으로는 마치 문학의 번성기를 맞은 듯 나쁘지 않은데···. 사람들이 온통 디지털 영상매체와 인터넷 세상 속에만 빠져 살고 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종이책이 팔리지 않으니 인세印稅 주고 책을 찍어주는 출판사가 없어져 문인들은 거의 자비自費 출판을 한다.
나름의 품격과 문제작 베스트셀러만 출간한다는 몇 개의 상업용 출판사들도 이제 제작비를 받고 출간해주고 있다. 책이 팔리지 않으니, 살아남으려면 팔리는 작품이나 문제작 상관없이 출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 출판사와 달리 제작비를 고액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출판사 이름의 이미지에 기대어 넉넉지 못한 문인들도 고가의 제작비를 무릅쓰고 출판의뢰가 이어지고 있다.
뿐인가. 원고료를 제대로 주지 못하는 문학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후원자가 없는 특수 조직의 창간호나 친목도모 목적의 문학지 외에, 게재료를 내고 작품을 싣는다는 서글픈 소식도 있다.
이렇듯 창작자의 당연한 수입원인 글 값도 인세도 한 구덕에 빠져,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문인들이 '글' 쓰기를 놓지 못하는,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도록 천형天刑의 업보業報를 타고났기 때문일까, 세상살이가 갈수록 변화무쌍 복잡해져 뭐든 토해내지 않으면 뇌경변의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아서일까. 내 삶이 너무 비감하고 원통해서일까. 내가 살아 있다는 맹렬한 표현일까.
문학예술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救援하고 정화淨化시키는 인간정신의 근원이라 했으니 자기치유의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해결책이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신神내림을 받은 듯 천생天生의 글귀신이 씌인 문인끼기, 우리끼리 서로 보듬어주고 읽어주고 격려해주고, 더러는 세상이 깨우치도록 삶의 진수를, 생명의 유려함과 소중함을, 살아있음에의 벅찬 환희를, 세상사람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주며 살아가면 어떨까 생각도 해본다. 문학은 인간의 영혼인 정신과 분리될 수 없는 근원根源적 생명체이니까. ▩ (p. 22-25)
-----------------
*『월간문학』2022-3월(637)호 <권두언>전문
* 김지연/ 소설가 ·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권두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숏텀 피드백 시대의 문학(부분)/ 박인성 (0) | 2022.06.13 |
---|---|
진실, 착각의 효과와 문인의 언어(부분)/ 강기옥 (0) | 2022.05.29 |
미완의 신비-로댕(전문)/ 임승빈 (0) | 2022.04.25 |
박순원_ 시를 살아가는 시인(발췌)/ 반성 740 : 김영승 (0) | 2022.04.10 |
한국시협 사화집『나의 얼굴』서문/ 나태주 (0) | 2022.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