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딩아돌하』를 내면서/ 2022-봄(62)호>
미완의 신비-로댕(전문)
임승빈/ 본지 주간
내겐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나의 기다림이 아니라, 내가 아닌 그 무언가가 한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40년도 넘게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막 대학원을 시작했을 무렵, 은사님은 내게 릴케의 「로댕」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읽다가, 서점에서 이오넬 지아누의 「로댕」 또한 발견하고 함께 읽어 볼 요량으로 사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책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40년도 더 지난 요즘에야 우연히 그 책을 발견하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세월 동안 책은 용케도 나를 잊지 않고 기다려 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왜 은사님이 「로댕」을 권했는지를 더 크게 절감할 수있었다.
릴케의 「로댕」은 로댕의 조각을 빌미로 한 릴케 나름의 상상과 사유의 결과라면, 이오넬 지아누의 그것은 로댕의 조각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릴케는 "예술가에게는 수많은 사물들로부터 하나의 사물을 만들어낼 권리와, 사물의 극히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이오넬 지아누는 사물의 그 극히 사소한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오넬 지아누에 의하면 로댕이 조각을 통해서 추구한 것은 "살아 있는 육체의 빛나는 모습", 다시 말하면, 생기나 생명성의 추구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생기나 생명성의 구현을 위해 로댕은 세 가지 원칙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것은 '구성'과 '미완성', 그리고 '안에서 밖으로의 표현' 등이다.
첫째, 로댕이 말하는 구성은 흔히 생각하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규칙과 대칭이 아니었다. 편안한 안정감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부조화이고 불균형이면서 동시에 비대칭이고 불규칙적인 것이었다. 그의 생각엔 살아있는 생명체가 어떻게 안정감 있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정확한 대칭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움직임이 어떻게 언제나 기계처럼 규칙적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생명이란 그 본질이 모순되고, 조화롭지 못하고, 비대칭의 불균형이며, 불규칙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미완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미완의 상태이고, 그래서 예술 또한 미완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모든 예술이 미완을 지향해야 한다니!
시詩가 없는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성神祕性이 없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완성품은 돌 속에 눈뜨고 있는 형태의 신비성을 더 잘 설명하는 데 공헌하였다. 미술가 각자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더 이상 진척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것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명을 뺏어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댕은 가끔 형태를 초벌 깎기 한 채로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그 순간 작품제작을 정지해버리는 대담성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막 이루어지려는, 생에 눈 뜬 형태의 탄생에 우리를 참가시키는 것이다.1)
시가 없이는, 신비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게 미술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시는 곧 신비성이다. 그러니까 그림이나 조각이 신비성을 갖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적인 특성을 지녀야 하는데, 미완의 상태보다 더 시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미완이어야만 생명성을 지닐 수 있고, 미완이어야만 시나 여타 예술은 진정 시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미완이어야만 완성을 향한 움직임의 지속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의 모든 문학과 예술이 갖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전달傳達에의 거부', '재현再現에의 거부'라면, 이것이 곧 미완에의 지향이고. 시적 특성이고, 상상과 사유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느낌과 의미로 흘러넘칠 수 있게 하는 신비성의 요체라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안에서 밖으로의 조형造形', 또는 '내면의 외적 표현'이다.
1891년 로댕은 문필가클럽위원회로부터 '발자크상'을 의뢰받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했으나, 끝내 거부당하고 말았다. 조각상이 실제 발자크와 닮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로댕은 작품을 수정하거나, 다시 제작하지 않았다. 조각가는 모델 자체에만 얽매인 노예일 수 없고, 발자크라는 모델의 한계를 벗어나서 그 자체로 족한 형태, 칸트식으로 말하면 '자기 충족성'이야말로 발자크의 천재성(내면)을 외적으로 더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델의 외형만을 사진 찍듯 똑같이 재현해 내는 것이 어찌 예술일 수 있느냐는, '재현에의 거부'였던 것이다.
로댕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은 안 계신 은사님을 생각했다. 이 같은 당신의 말씀으로 가슴이 저렸다.
"시를 쓰려면 그림도 공불해야지, 왜냐하면, 시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시니까. 물론 종당에는 시고 그림이고 다 알 수가 없는 거지만." ▩ (p. 10-13)
1) 이오넬 지아누, 김인수 · 신인영 역 『오귀스트 로댕』, (열화당, 1979),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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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2-봄(62)호/ <『딩아돌하』를 내면서> 전문
* 임승빈/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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