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isseu 비등단/ 채상우

검지 정숙자 2024. 2. 18. 15:37

 

    isseu 비등단

 

     채상우

 

 

  이번 호 이슈에 시론을 게재하는 시인들은 따로 등단하지 않고 파란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였거나(서호준, 김누누, 임후, 이효영, 이유야) 곧 발간 예정인(이재영) 이들이다. 그리고 산문을 실은 윤유나 시인도 이들과 같은 경우다. 그런데 이들을 두고 '비등단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일은 뭔가 꺼림칙하다. 시집을 발간했다면 그 순간 등단했다고 셈해 주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인' 앞에 등단 여부를 적는 일도 참 겸연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비등단 시인'이라고 감히 불러세우는 이유는 '비등단'이 환기하는 여러 맥락 때문이다. 물론 그 문맥의 대부분은 곧장 '문단  권력'과 같은 정치적인 쪽으로 눈길을 옮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언제나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좀 비켜서 '비등단'을 부정칭이자 어떤 상태로 이해하고자 한다. 윤유나 시인이 쓴 표현을 그대로 다시 쓰자면 "되어 가는 동시에 무너지는" 상태 말이다. 물론 윤유나 시인이 반복해 쓴 이 구절은 아직 아물지 않은 주저흔처럼 그의 글에 고통스럽게 문득문득 새겨져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멋지게 시인을 번안한 문장은 드물다. "되어 가는 동시에 무너지는"이라는 상태는 다만 '쓴다'라는 술어 속에 자기를 녹여 버린 부정칭으로서의 시인을 떠올리기에 마땅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요컨대 오롯이 '시를 쓰는 자'다. 달리 적자면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시인이 되어 가는 동시에 무너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겠다. '비'를, 갱신과 부정이 끊임없이 또한 동시에 작동하는 영구혁명의 원동력으로 끌어당길 때 비로소 '쓰는 자'로서 시인이 탄생할 것이다. 

   발행인 채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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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겨울(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