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한용국_내가 만난 '현대'의 눈(발췌)/ 모종의 날씨 : 김언

검지 정숙자 2024. 2. 18. 02:40

 <권두 essay> 中   

 

    모종의 날씨

 

     김언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닌가, 하고 진눈깨비 내렸다

  정말이지, 하고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함박눈, 나는 먼 길에 서서 독백하는 사람과

  자백받는 사람의 표정이 저러할까 싶은 표정으로 같은 하늘과

  다른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는 불어왔다,

  불어 갔다

  날씨보다 정치적인 것은 없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일러 주는

  많은 밤은 거짓말이었다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니지? 하고 아지랑이가 피었다

  그가 어떤 모자를 썼던가?

  빨간.

  그가 어떤 말을 하던가?

  푸른.

  정말이지,

  그는 내일 강연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는 마치 그림자가 다가오듯이

  나를 대한다 언젠가

  사람들이 눈물을 그치었다 생각하는

  오늘 같은 밤이 또 있을까?

  물론.

  

  별은 그가 반짝인다

    - 시집 『거인』, (문예중앙, 2011)

 

  ▶내가 만난 '현대'의 눈(발췌) _한용국/ 시인

  "설마, 하고 눈이 왔다"로 시작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도시의 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하고" 내리는 눈은 정확히 '현대'를 내리는, '현대'의 눈이자, '현대인'이 맞는 눈이었다. 물론 시에 현대적인 눈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형도가 있었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기형도, 「시작 메모」, 『입 속의 검은 입』) 기형도는 썼다. 그러나 기형도의 눈은 끝내 도시에, '현대'에 내려앉지 못하고, 자연 속으로 회귀하는 눈이었다. 그 눈은 내 삶과 가까운 것이었으나, 나에게는 돌아갈 자연이 없었고, 잠언이 없었다. 덧없음과 순간성, 우연성에 뿌리내려야 하는 모순을 살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드디어 '눈이 내렸다'가 아니라, "설마, 하고" 내리는 눈을 만난 것이다. "설마"라는 말만큼 현대를, 현대의 전망 부재의 속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설마"와 함께 내림으로써, 눈은 비로소 자신도 현대적인 존재임을, 자신의 현대적인 존재 증명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아닌가, 하고 진눈꺠비 내렸다" 사실 "설마"와 "아닌가" 사이에서 현대의 삶은 무수히 명멸하는 것이었다. 첫 두 행만으로도 나는 위로받았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먼 길" 위에 있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중얼거렸던 무수한 독백들은 결국 자백이었다. 도시 이전의 하늘과 이 하늘은 같은 하늘이었지만, 다른 구름이었다. 눈과 비가 섞이는 진눈깨비는 결국 나였으므로. 더 이상 길은 숲을 향해 나 있지 않았으므로. (p. 시 11-13/ 론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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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2023-겨울(31)호 <권두 essay> 에서  

  * 김언/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숨 쉬는 무덤』『거인』『소설을 쓰자』『모두가 움직인다』『한 문장』『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시론집『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평론집『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 산문집 『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

  * 한용국/ 2003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