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개를 위한 엘레지와 베토벤의 이야기들

검지 정숙자 2024. 2. 17. 00:55

<에세이 한 편>

 

    개를 위한 엘레지와 베토벤의 이야기들

     -Beethoven: Song for Voice and Piano, WoO 110 Elegle Auf Den Tod Eines Pudels

 

     배홍배

 

 

  Elegle auf den Tod eines Pudels(죽은 개를 위한 엘레지): 베토벤 이야기에서 첫 번째 미스터리는 그의 생일에 관한 것이다. 그의 생일에 관한 기록을 보면 1770년 12월 27일 본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만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베토벤은 피아노와 오르간, 바이올린을 배우고 7살에 콘서트에서 첫 연주를 했다. 12살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는데 그때 쓴 곡의 이름이 재미있다. 하나는 <갓난아이를 위한 노래>이고 뒤에 쓴 것은 <죽은 푸들을 위한 애가>였다. 그런데 그 행운의 개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1792년 베토벤은 비인으로 이사를 해서 1827년 3월 26일 57세에 간 관련 질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p. 317) 

  □ 베토벤의 미스터리한 사랑 이야기: 베토벤은 결혼한 적이 없다. 그는 독일의 오페라 가수 엘리자베스 로켈을 위해 그의 유명한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한 일이 있다. 베토벤이 그녀에게 청혼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초상화 밑에 '엘리제를 위하여'란 글귀를 써놓은 것을 보더라도 베토벤이 그녀를 열렬히 흠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친구 게르하르트 웨겔러의 기록에 의하면, 비인에서 베토벤은 늘 여자관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편지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 쓴 편지들이 있는데 '불멸의 연인'으로 알려진 그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최근의 그에 관한 전기들을 근거로 그 여인이 유명한 브렌타노 집안과 결혼을 한 '안토니 브렌타노'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p. 317~318) 

 주변 정리를 잘 하지 않고 지저분했지만 엄격했던
베토벤: 그의 주전자엔 늘 뭔가 들어있는 상태로 피아노 아래 놓여있었으며 남은 음식들이 그의 작품 원고들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뭉툭하고 곰보 자국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베토벤의 얼굴이었다. 어려선 상냥했던 작곡가가 자라면서 불평불만이 많은 괴팍한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하일리켄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그의 편지에서 베토벤은 그의 이런 성격이 점점 들리지 않는 귀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토벤이 그의 동생이 죽은 후 조카 칼의 양육을 맡게 되었을 때 얼마나 조카에게 엄격했던지 어린 칼이 삼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p. 318) 

  베토벤은 음악의 혁명가였다: 비인의 고전주의 음악은
베토벤에 와서 끝을 맺는다. 대걸레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베토벤의 헝클어진 머리는 음악의 혁명가로서, 낭만주의 개척자로서의 모습이다. 그가 교향곡 9번에 합창을 넣은 것은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베토벤은 극적인 곡의 전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긴 주제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짤막한 동기를 사용하길 좋아했는데 그의 교향곡 5번에서 잘 알 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과 협주곡, 현악곡들 그리고 한 곡의 오페라를 포함 240여 곡을 작곡했다. (p. 318~319) 

   베토벤에겐 꿈이 있었다:
베토벤은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현재를 위해 곡을 쓴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작품을 썼다. 그는 밤이 새도록 악보를 다시 쓰고 고치기를 일삼았다. 그는 목표를 이루었다. 베토벤의 곡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살아생전 그는 곡을 써서 밥을 먹기에 충분했다. 또한 유명인들로부터 후원도 많이 받았다. (p. 319) 

   쓰레기통에 버려질 뻔했던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터 프리헤르 폰 브라운은
베토벤에게 피델리오 오페라를 써달라고 의뢰한다. 1805년 초연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악평을 받은 베토벤은 개작하고, 다시 고쳐서 3번째 4번째 버전을 낸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프랑스 혁명 당시 있었던 한 여인의 영웅담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그녀는 남장으로 변복하고 자코빈 감옥으로부터 남편을 탈옥시키는 이야기다. 피델리오에 나오는 한 아리아는 도이지 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수십 년간 인터벌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p. 319) 

   그는 나폴레옹에게 영감을 받기도 분개하기도 했다:
 베토벤은 음악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과 문학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초기 음악은 영웅담을 많이 다루었는데, 나폴레옹을 존경하여 자신의 3번째 교향곡 <영웅>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분개하여 악보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p. 320) 

   다다다 단-베토벤은 최소한의 음으로 더 많은 것을 나타냈다: 1808년 그의 5번째 교향곡이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첫 악장의 모티브는 단 3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발표한 교향곡의 숫자도 모차르트의 41곡에 비해 훨씬 적은 9곡이었다. 그의 심각한 표정과 약간 찡그린 듯 보이는 얼굴과 사자머리는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음악가들보다 더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는데 오늘날의 관점으로 봐도 그는 혁명적이고 전투적이며 난해한 예술가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연주 레파토리로 보통 9개의 교향곡을 가지고 있는 것은 베토벤 때문인데, 그의 9개의 교향곡들은 이해하기도 쉽고 굉장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서 유명 관현악단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즐겨 연주했고, 이는 다음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말러부르크너 같은 작곡가들이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p. 320) 

   베토벤은 CD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토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음악으로 만든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악장으로 알려졌다. 베토벤이 이 곡을 쓰기 시작했을 땐 이미 그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1824년 5월 7일 자신의 교향곡이 초연될 때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 교향곡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유명한 곡으로 알려졌다. 1985년 이래 악기의 버전으로 편곡된 <환희의 송가>는 유럽 연합 축제의 음악이 되었다. 1982년 CD 한 장의 공식적인 연주 시간이 80분으로 결정된 것은 베토벤의 9교향곡의 길이가 70분인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음향 제작자들이 유명 지휘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을 때 지휘자 카라얀이 CD 한 장에 베토벤의 9번째 교향곡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p. 321) 

   쥐벼룩이 베토벤의 귀를 멀게 했을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20대 후반부터 귀가 멀기 시작했다. 그는 49세 때 전혀 들을 수 없었으나 심한 이명을 앓고 있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귓병은 쥐의 벼룩이 옮긴 티푸스균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작곡을 계속한다. 베토벤은 귀만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성적인 두통을 앓았다. 베토벤은 절대 음감의 소유자여서, 악기가 내는 소리를 듣지 않고서도 소리와 화음을 마음속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당시 그의 귓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염증을 생기게 하여 더욱 베토벤의 귓병을 악화시켰을 거란 것이 오늘날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외로워지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의 전기만 읽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베토벤에게 공평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p. 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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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홍배 著_시에세이 『빵 냄새가 나는 음악』/ 2023. 11. 20. <시산맥사> 펴냄

  * 배홍배/ 1953 장흥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단단한 새』『바람의 색깔』『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풍경과 간이역』『송가인에서 베토벤까지』『Classic 명곡 205』등, 오디오평론가, 사진가, 번역 활동,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