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윤정구_시사(詩史)를 뚫고 간 시의 진화 궤적의 경이/ 극지 行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23. 3. 18. 01:25

<『문학과창작』2023-봄(177)호 <연재16  부채시로 안부를 묻다> 中

 

    극지 行

 

    정숙자

 

 

  한층 더 고독해

 

  진다

 

 자라고

 자라고

 자라, 훌쩍

 자라오른 나무는

 

 그 우듬지가

 신조차 쓸쓸한

 허공에 걸린다

 

 산 채로

 선 채로, 홀로

 

 그러나 결국 그이는

 

 한층 더 짙 푸른

 화석이 된다

  - 시집『공검 & 굴원』(2022, 미네르바)  

 

  ▶ 시사詩史를 뚫고 간 시의 진화 궤적의 경이(전문) _ 윤정구/ 시인 

  정숙자 시인은 처음 만난 것은 교보문화재단의 창작지원에 함께 뽑혔던 97년이었다. 그로써 정 시인은 여섯 번째 시집 『정읍사의 달밤처럼』을 엮었고, 나는 첫 시집인 『눈 속의 푸른 풀밭』을 엮었다. 몇 번의 시인 모임에 나가면서 초심자였던 나는 시협 세미나에 한 테이블에 앉기도 하고, 서강대에서 열린 철학 특강을 함께 듣기도 하면서 정 시인이 얼마나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던 그의 시집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이었다. 마치 방언方言처럼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낯선 문법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열 번째 시집 『공검 & 굴원』은 달랐다. 낯선 골짜기를 벗어나 능선에 이른 알피니스트처럼 시인의 발걸음은 안정되고 힘찼던 것이다.

 

    그동안 시인이 추구해온 시의 궤적을 발전 단계별로 구분한다면 어떠할까,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여러 단계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초기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쓴 야생 시였습니다. 1-2시집은 사모思慕라는 주제의 연작시였습니다. 시신詩神께 바치는 그리움이 절절했지요. 3-4 시집은 등단 이전에 쓴 2,000여 편 중에서 추려 묶은 것이에요, 참으로 철없는 소행이었지요. 5-6 시집에 이르러 겨우 모더니티(modernity)가 도입되었고요. 7-8 시집은 구조주의 이론이 어느 정도 체화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드디어 9-10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공검 & 굴원』)에서 포스트 구조주의가 실현되었지요. 그러니까 시집을 낼 때마다 이전 시집과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기 탈각에 집중했던 듯합니다. 만약 전집을 묶는다면 개인의 시집만으로 시사의 흐름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스펙트럼이 저절로 이루어졌어요.

 

    급격한 변화라 할 수도 있는 <액체계단>을 오르시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이론의 육화’입니다. 구조주의란 작위주의(作爲主義↔自然主義)인데, 어떻게 작위 하느냐에 천착한 결과라고 봐야겠지요. 온갖 용어가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에 등장하지만 결국, 그 모두를 통합/표현하는 기법의 습득이었죠. 어떤 사물이나 상황 너머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인식’을 형상화한 것의 증명이 <액체계단>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액체가 계단이 되기까지는 전 생애가 소비된 셈이에요.”

 

    『액체계단』은 충격적이었지만, 비판도 많이 받으셨을 터인데, 가장 긍정적인 평가는 누가 무어라고 칭찬하였는지요? 이해가 부족한 악플도 소개할 만한 것이 있나요?

  “네, 다행히 악플은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이 서평을 써주셨어요. 평론가 이찬은 “이질적인 오브제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콜라주 기법의 도입”이라면서 “정숙자의 시가 원초적 차원에서 이루어 왔던 우주적 아날로지의 세계와 더불어 자유간접화법으로 표상되는 현대 미학의 비유기적 파편성의 세계를 동시에 공존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했고요. 시인이며 평론가인 오민석은 “마치 브레히트의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처럼 독자들에게 편안한 소비의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숙자는 개념, 이미지, 상징, 문장과 문장 사이의 접점들을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써 독자를 ‘사유思惟’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텍스트로부터 이화異化된 독자들이 소외 상태에서 정숙자의 텍스트에 동화同和되는 과정이 정숙자 언어의 문법을 이해하는 과정이다.”라고요.”

 

    『공검 & 굴원』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 비해 공감도 많이 받고, 인정도 받았겠지요?

  “네,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이 주목을 받았다면, 이번 시집 『공검 & 굴원』은 그때의 주목에 대한 인정이 아닐까 싶어요. 더 이상의 새로운 형식은 과욕으로 여겨 좀 편안한 쪽으로 가다듬었죠. ‘문장을 공부하여 궁극에 이르면 다른 기이함이 없고 다만 알맞을 뿐이며, 인격을 도야하여 궁극에 이르면 다른 기이함이 없고 다만 본연일 뿐이다.’라는 『채근담』의 금언도 떠올리면서요.

 

    시인께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시의 지점은 어디쯤 위치할까요, 목표를 가늠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궁극은 이미 표출되지 않았을까요? 다만 남은 삶을 어떻게 운영해야 자신과 주위에 도움이 될까, 불가능할지라도 어떤 모습이 정합적인 삶일까 더듬는 중입니다.”

 

    인생은 짧고, 득도의 길은 험하다. 시인이 독특한 자신의 세계를 이루기는 어렵고 어렵다. 그 험난한 길을 더듬어 올라 이만큼의 높이에 도달한 정 시인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시의 여정은 인적 드문 미지의 극지를 말없이 탐험하는 것과 같을까? 독특한 어법의 「공검」을 다음으로 미루고 부채에는 「극지 行」을 선택한다. (p. 시 136-137/ 론 134-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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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2023-(177)<연재16-서예로 만나는 부채시/ 부채시로 안부를 묻다>에서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한 뼘이라는 적멸』등, 저서『한국현대시인을 찾아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