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하느님
이훈강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고 강남역 사거리를 서성이다 구조된 노인은 치매에 걸려 있었다. 집 주소며 가족들의 전화번호, 어느 것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노인의 눈망울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노인의 주머니 속 3만 원은 인정 있는 자식의 마지막 인사였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버쳐버리고 텅 빈 종소리만 남은 인생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이 없다, 지문 검사를 통해 도심의 한 옥탑방에서 딸을 찾았다고 말해주었을 때, 노인은 굳게 닫힌 입을 열어 딸의 형편이 어려우니 요양원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자신을 버린 자식들을 걱정하는 노인의 촉촉한 눈망울 속에서,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다.
-전문(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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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창작』 2022-봄(173)호 <2000년대 시인 신작시> 에서
* 이훈강/ 2002년 『한국시』로 등단, 시집『삼월의 봄바람은 꽃을 들고 오더이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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