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막/ 지인 사막의 사랑 지인 모래가 바람에 날리며 운다 하여 이름 지어진 명사산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금모래 구릉 아래 모래 무덤 속 수의를 입고 누워 있는 미라 전쟁에 이루지 못한 사랑 사무치게 기다리네 죽어 새가 된 사내 큰 날개 퍼덕이며 모래바람으로 불어와 모래가 된 젖무덤 파헤..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2.01.13
사월/ 정채원 사월 정채원 여자는 분수대 벤치에 누워있다 숨진 지 여러 날 되는 아기를 품에 꼭 안고 보랏빛 작은 입술 속으로 퉁퉁 불은 젖을 짜넣고 있다 아기가 죽은 뒤에도 머리카락이 일 센티쯤 자랐다 * (사)한국시인협회 편 『멀리 가는 밝은 말들』2011.12.24 <도서출판 황금알> 펴냄 *..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2.01.13
당나귀와 애인/ 김영찬 당나귀와 애인 김영찬 나는 네가 당나귀일 때가 좋아 참 좋아 당나귀는 말이 없지 말총꼬리 흔들어 날파리를 쫓는다 하지만 악다구니들은 달아나는 척 멀리 물러났다가 화롯가에 모여들듯 눈곱 낀 당나귀 눈자위에 빙 둘러앉지 눈가의 깊은 주름 호수에 발을 담근 해 날파리들은 ..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2.01.10
나는 지금 물푸레섬으로 간다/ 이영식 나는 지금 물푸레섬으로 간다 이영식 물푸레, 그래 물푸레섬- 이름만 굴려 봐도 입가에 푸른 물이 고이는 섬이렷다 연안부두에서 어쩌고 덕적도 어쩌고…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대로 이배저배 갈아타고 반나절, 쉼표처럼 떠 있는 섬 자락에 닿으면 초록물감 한 됫박씩 뒤집어쓴 물..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12.26
속도의 식욕/ 강서완 속도의 식욕 강서완 처마 끝 제비집에 침범한 구렁이는 세 마리의 새끼를 먹었고 나의 냉동고에는 쇠고기 육백 그램과 언 닭다리 한 봉지가 있어요 양식으로 불릴 때 사체는 신성하죠 석류 한 잎 깨문 입처럼 진자리 모르는 붉은 꽃잎은 라라, 즐거워요 잘근잘근 부순 꽃의 살점이..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11.15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다/ 김경주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다 김경주 깊은 곳에서 자란 살들은 차다 고등어를 굽다 보면 제일 먼저 고등어의 입이 벌 어진다 아...하고 벌어진다 주룩주룩 입에서 검은 허구들이 흘러나온다 찬 총알 하나가 불 속에서 울 고 있듯이 몸 안의 해저를 천천히 쏟아낸다 등뼈가 불을 부풀리..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11.15
모래척추/ 마경덕 모래척추 마경덕 평생 누워있는 사막, 바람이 불 때마다 와르르 척추가 흘러내린다 모래척추는 사막의 고질병, 수렁과 유사(流砂)는 살아있는 뼈를 삼켰지만 사막의 등뼈는 자라지 않았다 척추가 무른 아비 어미도 그렇게 평생을 뒹굴며 늙어가고 흙바람이 불 때마다 낙타의 무릎만 단단해졌다 만년..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10.18
이모를 경배하라/ 이영혜 이모를 경배하라 이영혜 “<급구> 주방 이모 구함” 자주 가는 고깃집에서 애타게 이모를 찾고 있다 고모(姑母)는 아니고 반드시 이모(姨母)다 언제부턴가 아줌마가 사라진 자리에 이모가 등장했다 시장에서도, 음식점에서도, 병원에서도 이모가 대세다 단군자손의 모계가 다 한 피로 섞여 외족, ..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5.25
광대/ 문효치 광대 문효치 달빛 중에서도 산이나 들에 내리지 않고 빨랫줄에 내린 것은 광대다 줄이 능청거릴 때마다 몸을 휘청거리며 달에서 가지고 온 미친 기운으로 번쩍이며 보는 이의 가슴을 조이게 한다 달빛이라도 어떤 것은 오동잎에 내려 멋을 부리고 어떤 것은 기와지붕에 내려 편안하다 또..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5.22
극락강역/ 허형만 극락강역 허형만 서두르지 마라 지금은 가늘어진 물줄기 만큼이나 극, 락, 극, 락 강물소리 낮게 깔리고 갓맑은 햇살들이 오종종 쉬고 있다 외로워마라 쥐꼬리무우 자라던 밭은 없어졌지만 극, 락, 극, 락 가랑눈 가녈가녈 내리고 바람도 흐벅져서 마음이 넉넉하다 <극락강역: 광주시 광산구 신가동 2..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