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주머니
황미현
한 번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 주머니
속이 너무 깊어서
쌀 한 자루도 넣을 수 있는 주머니
가득 차 있는 일보다
비어 있는 일들로
진화해 온 주머니
모금함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가 또 있을까?
혼자서 빛나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주머니일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몇 올의 실밥에서 지붕을 눌러쓴
반달이 딸려 나오고
꽃의 시절에 환하게 빛나던
희극적 순간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다 주머니에서
꽃 피던 일이었다는 것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제목이 숨겨져 있는 이 시편은 "한 번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 주머니"를 불러온다. 속이 너무 깊어 "쌀 한 자루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는 '가득 참'보다 '비어 있음'으로 진화해 온 어떤 성스러운 실재를 환기해 준다. 시인은 어느날 모금함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머뭇거렸는데 그때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가 또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주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빛나는 어떤 성소聖所이기도 했을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모든 기억들이 엮여 나오고 환하게 빛나던 순간마저 떠오른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은 주머니에서 꽃이 피던 일이 아닌가. 그 점에서 시인은 자신이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꽃 피는 주머니'가 가져다준 가장 오래고 신성한 시간의 흔적에 대한 회상이 황미현 시의 심층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p. 시 56-57/ 론 149-150)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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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에서/ 2022. 2. 28. <시작> 펴냄
* 황미현/ 서울 출생, 2019년『시작』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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